*
애셔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리에 영구적인 상해를 입었습니다. 검붉게 얼룩진 기이한 상흔은 타드는 고통과 함께 하체에 번져갔습니다. 그로 인한 우울은 그보다도 더 빠르게, 온몸으로······.
살갗을 검게 괴사시킨 그것은 원인 불명의 병명과 함께 타개가 불가하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전신을 포박했던 기계들을 거두며, 의사는 얼마 남잖은 여생이라도 자유로이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며 결국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자유로이'라는 건 어폐가 있죠. 애셔는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
통증은 나날이 심해져만 갔습니다. 팔목에 매달린 의약용 모르핀의 투여량이 점점 늘어나고, 그와 함께 그의 탈력감은 극도에 달해갑니다. 자유를 빼앗긴 애셔는 언어를 상실한 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매일이 한숨과 헛웃음으로 채워졌습니다. 빈센트는 종종 병문안을 왔습니다. 어쩌면 계속 옆에서 24시간 간병을 자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셔가 웃는 날이 점차 적어져만 갔습니다.
이제는 흐릿하지만, 마지막엔 하루종일 미소를 띄고 있었던 것 같아요.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서늘한 새벽 애셔는 끝내 세상을 등졌습니다.
떠난 이유는 망자만이 알고 있으나 분명한 건, 자살은 그의 의지였습니다. 당신에게 쥐여진 건 그저 초라한 부고 소식뿐입니다. 텅 빈 유서를 읽지조차 못하던 당신의 참담을 그 누구도 감히 가늠치 않았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기적과도 같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망자를 다시 되살릴 수 있다는 경건하고도 엄숙한 신의 자비. 당신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조아렸나요, 아니면······ 신을 향한 저주의 말들을 퍼부었던가요. 뭐가 됐든 신은 비소를 지었습니다.
네 목숨을 천칭에 올려 균형을 맞춘다면, 가장 처음으로 되돌려 주겠다.
잔인하게도 당신은 시간을 되돌리는 걸 성공했습니다. 맥동음을 재는 규칙적인 기계 소리, 웃지 않는 애셔, 투명한 링겔 튜브, 하얀 침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죠.
그 어떤 안락으로도, 평화로도, 격려로도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신의 시간은 다시금 거꾸로 흐릅니다.
그래요. 당신, 서른한 번째입니다.당신이 무엇을 행해도 애셔는 자살했습니다.하지만, 이번에도 당신은 그 죽음을 막으러 갈 겁니다.
KPC Asher PC Vincent Valen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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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1 서른한 번째 아침 ───────
폐부에 밀려드는 거센 날숨에 빈센트는 깨어납니다.
훅 끼쳐오는 과호흡의 전조로 기침이 목울대를 거칠게 긁습니다.
지독하게 소독된 알콜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합니다.
새하얀 이불에 고개를 묻고 있던 빈센트가 기침하며 고개를 들자, 의아한 표정의 애셔가 의문을 그득 담은 음성으로 말합니다.
애셔가 진통제를 손아귀 가득 쥐고 입에 욱여 넣었던 순간이 스치웁니다.
면역될 리 없는 그 통증에 동조라도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혹은 차라리 내가 쟤를 대신해 병상에 누웠다면.
백빛으로 점철된 지루한 병원 복도를 배회하며 당신만이 아는 이름을 되뇌었고, 종국내 서른 번째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안구를 때리며 현실로 고착시킵니다.
애셔가 죽음을 선택한 지 서른 번째가 되었고, 빈센트 당신이 자기 자신을 살해한 지도 서른 번째입니다.
Asher:악몽이라도 꿨어? 너, 계속 누굴 부르면서 앓더라.
애쉬 에테리아, 애쉬 에테리아.
하하.
Vincent Valentin:아하하....... 꿈에서 너랑 싸웠나 보네. 미울 때만 그렇게 부르는데.
Asher:어지간히 미웠나 봐. 꿈은 무의식을 아주 반영한다잖아.
정말, 많이, 미웠구나.
좀 어때? 몸이든, 기분이든.
······평소랑 비슷한데. 발목이, 발목이 시큰거린다. 원래 여기까지 아팠었나.
Vincent Valentin:일부러 함구한 거지. 정말, 많이, 너무 밉다는 말 들어서 어디 쓰려고.
많이 안 좋아? 의사 부를까?
정말, 많이, 너무, 진짜 미운 놈 안 챙겨 줘도 돼.
나 꿈에서도 싸우고 여기서도 싸워야 해?
아, 그래. 음. 꿈에선 왜 싸웠는데?
Vincent Valentin:왜 싸웠더라. 네가 내 말을 안 들어 줬을걸.......
Asher:꿈은 꿈이구나. 나 원랜 네 말 되게 잘 듣는데. 내심 반항을 바랐던 건 아니지?
Vincent Valentin:허....... 네가 내 말을 잘 들어?
Vincent Valentin:응? (본다. 빤히.......)
Vincent Valentin:생각보다 객관화가 덜 되어 있네.......
너야말로.
아침 햇볕이 창문 틈새로 드리우고, 노란 빛무리가 눈동자에 닿아 유유히 빛납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참,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병약합니다.
고른 숨소리는 두어 번 호흡을 게우며 통증으로 앓는 신음성이 섞입니다.
이를 악물며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에 걱정이 됐던가요.
간병인의 상투적인 말은 지겹도록 많이 들었던 문장 중 하나입니다.
머리를 하나로 틀어 묶은 나이 지긋한 여성은 주사기에 담긴 여러 진통제를 트레이에 담아 천천히 들어섭니다.
익숙한 기색으로 애셔의 팔목에 연결된 링겔에 진통제 몇 개를 혼합해 넣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빈센트를 바라봅니다.
서른 번 들었던 주의사항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려는 것 같군요.
➤:오늘 통증을 심하게 호소하셔서 진통제와 안정제를 섞어서 드렸어요.
점심 드시기 전까지 푹 주무시게 두세요.
Vincent Valentin:예에....... 감사합니다.
엷은 미소를 덧그리며 늘 행하던 일을 마친 간병인은 천천히 자리를 나섭니다.
잠든 상태에선 그 무엇도 하지 못할 테니까요.
'이번엔'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는지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인해 더 이상의 치료를 그만둔 후 쭉 지내고 있는 곳입니다.
통증과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에 내부 청결과 안락에 힘 쓴 공간입니다.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이 창문, 책상, 책꽂이, 약물 진열장, 애셔 정도겠습니다.
Vincent Valentin:(기지개 쭉....... 창문 살핀다.)
애셔가 잠들어 있는 이불보에 햇볕을 묻히고 있는 주범입니다.
바깥에 나갈 수 없는 애셔를 배려해 외부를 더 넓게 볼 수 있게끔 전창을 터 놓았습니다.
바깥은 드넓은 푸른 하늘과 바삐 출근하는 이들로 가득입니다.
Vincent Valentin:
관찰력
기준치: |
60/30/12 |
굴림: |
5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정갈하게 늘어진 자동차들, 신호등, 일렬로 줄지어 이동하는 사람들.
여명은 염증내로 얼룩진 이불을 비추고 있어도, 결코 희망이 되진 않았으니까요.
Vincent Valentin:(책상도 살핀다.)
평소 업무……? 로 바빴던 애셔가 자주 앉아 있었던 책상입니다.
지금은 작은 마찰에도 통증을 호소하기 때문에 의자에 앉는 것조차 고통이어서, 과거의 부산물이 되었을 뿐입니다.
책상 위에는 애셔가 자주 사용했던 노트북과 일기장이 놓여 있습니다.
Vincent Valentin:(구라겠지....... 노트북 열어 본다.)
매끄럽게 은빛으로 뻗은 사각의 전자기기를 열자,
Vincent Valentin:(어....... 1234?)
Vincent Valentin:(0000....... 됐다. 닫고 일기장 본다.)
애셔가 사고를 당한 후부터 적기 시작한 일기장입니다.
검은색 가죽 케이스에 줄만 그어져 있는 가벼운 노트입니다.
되감기를 반복해도 내용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펼쳐 보나요?
Vincent Valentin:(일기장 펼친다.)
XXXX. XX. XX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
Vincent Valentin:(좀 더 넘겨 본다.)
보는 사람이 다 힘겨울 정도로 고달픈 통증 호소문의 연속입니다.
마구 휘갈겨 알아볼 수 없는 검정만이 낭자합니다.
Vincent Valentin:
SAN Roll
기준치: |
20/10/4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Vincent Valentin:(덮고 눈꺼풀 꾹꾹....... 책꽂이 살핀다.)
애셔가 좋아하는 서적류로 듬성듬성 채워진 책장입니다.
외출을 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들이 종종 원하는 책들을 사다 주거나 주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통증이 이렇게 심하지 않았을 땐, 직접 목소리로 읽어주기도 했었는데.
Vincent Valentin:
관찰력
기준치: |
60/30/12 |
굴림: |
1 |
판정결과: |
대성공 |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책들 중, 낯선 책 하나를 발견합니다.
Vincent Valentin:(누, 눈이 잘 보여. 책 꺼내 본다.)
하지만 눈이 트인 것과는 별개로, 이 표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책이었을 수도 있겠군요.
루프를 반복하면서 애셔의 침실을 전부 꼼꼼히 살피진 않았기 때문에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Vincent Valentin:(책 펼쳐 본다.)
어느 나라의 언어도 아닌 것 같은 문자 나열의 연속입니다.
글자는 마치 종이를 먹빛 여백으로 가득 채울 듯 서로 엉겨 백색을 집어 삼킵니다.
결국 검은색으로 가득해진 종이는 무엇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마지막 장에 흰 글씨로 휘갈겨진 한자가 보였습니다.
백빛 고결로 흘려써진 그것이 어쩐지 가슴을 아리게 만듭니다.
Vincent Valentin:(긁적....... 약물 진열장으로 넘어간다.)
직접적인 병 치료가 불가능한 애셔의 통증 경감과 연명을 위한 약물이 진열장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마약성 진통제, 해열제, 소염제, 스테로이드.
진열장 아래에는 링겔에 바로 주사하거나 근육에 주사할 수 있는 주사기들이 채워져 있습니다.
간병인이 트레이에 담고 왔던 주사기는 아래 의료 폐기물 박스에 따로 버려져 있습니다.
Vincent Valentin:(폐기물 박스 훑어 본다.)
약물을 담았던 주사기와 앰플이 버려져 있습니다.
바늘은 따로 제거해 버려야 하기 때문에 주사기 몸통만 남겨져 있습니다.
Vincent Valentin:(별것 없네....... 애셔 곁으로 돌아간다.)
빈센트, 당신이 자신의 생을 바쳐가며 지속적으로 과거에 고착된 모든 이유입니다.
Vincent Valentin:(그럼 그걸 계속 사냐.......)
그는 안정제를 투여 받고 지친 기색으로 잠들어 있습니다.
앙상한 손목에 꽂아진 링겔로 매일같이 진통제가 투여되고 있습니다.
Vincent Valentin:(이불 살짝 들춘다. 안 깨게 조심조심.......)
깊게 잠든 애셔가 깨지 않게끔, 고요한 손길로 이불을 걷기 시작합니다.
흰 이불 속에 포박된 다리가 허공에 노출되자, 염증 들끓는 시큼한 악취가 코를 찌릅니다.
분명, 애셔의 상흔은 발등까지만 덮고 있었죠.
건조한 살 표피 틈새로 검게 썩어든 그것은, 마치 화상흉처럼 기괴하게 돋아나 발목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빈센트 님, 간병인입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애셔가 점심에 먹을 스프를 끓이고 있던 간병인은 느슨하게 입매를 풀어 미소를 덧그립니다.
마른 수건에 손을 닦은 후 당신과 마주한 이는 조금, 곤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습니다.
아마 늘 말하던 점심 식사를 대신 전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겠죠.
그 이후엔 산책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며 휠체어를 끌어다 줄 것……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일을 그만두게 됐어요.
간병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른 번 들었던 말과 다릅니다.
➤:갑작스럽게 집안일이 생겨서 이곳에 있기 힘들 것 같아요.
애셔 님께는 미리 말씀드렸어요.
빈센트 님께서는 여기 자주 계시니까 말씀드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젖은 손길을 손수건에 닦아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냅니다.
Vincent Valentin:왜....... 뭐, 무슨 일이신데요?
➤:제 가족이······ 아파서요.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죄송합니다.
Vincent Valentin:아아. 네. 그럼, 뭐. 다른 분이 오시는 거예요?
➤:네. 애셔 님이 따로 구하겠다고 하셨어요.
Vincent Valentin:아....... 예. 수고하셨어요, 그간.
그녀는 마지막 다정을 남기고 자리를 떠납니다.
공허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당신은 현실을 분간하기 위해 애씁니다.
애셔의 발목 흉터, 간병인의 갑작스러운 퇴직.
번잡스러운 마음을 채 정돈하지도 못했을 때, 침실 안에서 작은 소음이 들립니다.
Vincent Valentin:(벌써 깼나? 다시 침대 쪽으로 향한다.)
빈센트, 당신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형장 외엔 그곳을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핏물에 절은 섬유는 축축해져 삼키지 못한 것들을 바닥에 방울방울 게워내고 있습니다.
그가 덜덜 떠는 손길로 움켜쥐고 있는 건, 진열장 안에 있던 주사기입니다.
혓속에 감춘 거친 울음과 신음이 고막을 따갑게 내리칩니다.
나 아파.
이만 보내 줄래······.
울컥 피가 솟구치는 상흔을 쥐어짜듯 움켜쥔 애셔가 울음찬 성음으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Vincent Valentin:왜.......
왜 그러는 거야? 나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래.......
너만 아픈 게 아니잖아. 아니, 그래, 네가 몇 배는 더 아프지만, 나도. 나는.......
나는? 애셔. 나는 어떡해?
에테리아.
Asher:살아야지. 너는 살아서 쭈욱 날 미워해야지.
애셔. 애쉬, 에테리아. 그러다 내가 더 이상 밉지 않을 때.
그때 안아 줘.
내가....... 내가 이 삶에서 뭘 더 느껴야 해?
뭘 더 느낄 수 있는데?
네가 있어야 미워할 수가 있는 거잖아. 네가 존재를 해야 안아 주든 말든 할 것 아니야.
더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는데도 너 때문에 난 아직까지 여기 있잖아.
이젠 지겹다기보다도 힘들다.
마지막 인사를 하자.
Vincent Valentin:내가 널 괴롭게 했구나.
내가 널 붙잡아 둔 게 너무 괴로웠던 거지, 그치. 네가 네 손목을 찌를 정도로 괴로운 거잖아.
....... 괜찮아. 그래. 괜찮아.
괜찮아....... 또 볼 수 있을 거야. 그땐 지금보다 나아질 수도 있는 거고.......
Asher:······ ······하하, 하. 밸런타인.
아팠어.
안녕.
코 끝을 지독히 저리게 만드는 비린내, 염증내, 눈물로 잠겨든 성대가 발음하는 모든 언어가 당신의 심장을 두들깁니다.
수십 번 들었던 작별 인사와 고해는 여전히 비탄으로 뭉쳐 당신을 괴롭힙니다.
그 생에 걸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끝이기 짝이 없습니다.
대지를 딛고 서서 손을, 품을 내어 주던 품은 분명한 무게를 가졌던 때가 있었는데.
서늘히 식어가는 체온, 답하지 않는 입술, 피로 젖어든 몸…….
어떤 안락으로도, 평화로도, 격려로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무력함을 비관하며 상실을 곱씹을 수 밖에 없겠습니다.
───────END.1 서른한 번째 시도 ───────
시간의 결에 마모된 당신은 다시 실패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죽음으로 당신의 곁을 달아난 이를 붙잡을 수 없었어요.
───────BAD ENDING ───────
아마 이것으로 수없이, 자신의 손목을 관통시키며 끝을 바랐을 겁니다.
Vincent Valentin:(마음의 준비고 뭐고 할 것도 없다. 이제 쫄 것도 없지....... 돌아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고, 죽는다면 또한 그것대로 괜찮다. 마른 얼굴을 쓸다가 바늘을 쥐고 손목을 수차례 찔러낸다. 일련의 과정들이 지나치게 말끔하고, 자연스럽다. 살아가는 것보다 쉬운 것 같기도 하고.......)
─────── SE.2 서른두 번째 점심 ───────
폐부에 밀려드는 거센 날숨에 빈센트는 깨어납니다.
훅 끼쳐오는 과호흡의 전조로 기침이 목울대를 거칠게 긁습니다.
지독하게 소독된 알콜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합니다.
새하얀 이불에 고개를 묻고 있던 빈센트가 기침하며 고개를 들자, 의아한 표정의 애셔가 의문을 그득 담은 음성으로 말합니다.
면역될 리 없는 그 통증에 동조라도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혹은 차라리 내가 쟤를 대신해 병상에 누웠다면.
당신은 종국내 서른한 번째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안구를 때리며 현실로 고착시킵니다.
애셔가 죽음을 선택한 지 서른한 번째가 되었고, 빈센트 당신이 자기 자신을 살해한 지도 서른한 번째입니다.
Asher:악몽이라도 꿨어? 너, 계속 누굴 부르면서 앓더라.
애쉬 에테리아, 애쉬 에테리아.
하하.
그런데, 빈센트. 나 이상한 꿈을 꿨어.
Vincent Valentin:왜애. 말해 줘.
Vincent Valentin:내가 너 미워하는 게 뭐, 하루이틀이니.......
Vincent Valentin:무슨 꿈 꿨는데, 애셔. 응?
Vincent Valentin:....... 네가?
Asher:응. 주삿바늘로, 여길······. (검지로 반대편 손목 가른다.)
서른 번째부터 생겨난 이변이 이번에도 일어났음을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애셔가 기억하는 건 처음 아닌가요?
Vincent Valentin:음. 꿈은 반대라더라.
넌 무슨 꿈 꿨어?
Vincent Valentin:맞혀 봐.무슨 꿈 꿨게.
Vincent Valentin:그건 이미 알고 있던 거잖아. 내가 네 이름 불렀다며.
으음, 내가 또 미운 짓을 했구나. 네 꿈속에서.
Vincent Valentin:응. 어떻게 알았지.......
미울 때만 그렇게 부른다고.
Vincent Valentin:아하하, 잘 아네. 진짜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침 햇볕이 창문 틈새로 드리우고, 노란 빛무리가 눈동자에 닿아 유유히 빛납니다.
하지만, 그와 달리 그을음 짙은 눈밑과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참,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병약합니다.
고른 숨소리는 두어 번 호흡을 게우며 통증으로 앓는 신음성이 섞입니다.
그리곤 병상 옆에 있는 작은 스프 그릇을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합니다.
저건 분명 전 루프에서 그만 둔 간병인이 만들던 게 아니던가요.
Vincent Valentin:....... 몇 시야, 지금?
Vincent Valentin:내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
Asher:많이 지쳤나 보다. 돌아가서 쉬는 게 어때.
Vincent Valentin:됐어. 여기나 집이나.......
Asher:여긴 좀 불편하지 않아? 마땅히 네 몸 뉘일 곳도 없고.
Vincent Valentin:나 갔으면 좋겠어?
Vincent Valentin:그럼 안 갈게.
오늘따라 입맛이 없네.
Vincent Valentin:왜....... 한 숟갈만 더 먹지.
Asher:좀만, 잤다가······. 아픈 것 좀 가시면 마저 먹을게.
아, 간병인이 오늘 일을 그만뒀어. 넌 자느라 못 들었지.
곧 다른 사람을 구해 보려고.
네가 언제까지고 여기 있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Vincent Valentin:딱히 상관은 없는데. 내가 뭐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Asher:그래도. 아무튼, 그러니까 구해지면 넌 집 가서 눈이라도 좀 편히 붙여.
Vincent Valentin:(착한 표정. 대꾸는 않는다.)
Vincent Valentin:(못 들은 척....... 폭 엎드린다.)
Asher:······간병인 따로 구하지 말까?
네가 내 간병인 해. 월급 많이 줄게······.
Vincent Valentin:술로 줘.......
Asher:내가 이젠 훔치러 나갈 수가 없다.
Vincent Valentin:예나 지금이나 살 생각은 않고.
돈이 없어.
Vincent Valentin:그러면서 월급을 주겠다고?
Vincent Valentin:나도 농담이었어. 안 줘도 돼. 당연하지만.......
Asher:(나른하게 웃는 소리가 서서히 느려진다. 눈 길게 감았다 떴다.) 음, 졸리다.
Vincent Valentin:(이불의 구겨진 쪽을 살살 폈다.) 좀 자, 애셔.
Asher:응. 너도 좀 더 쉬고······.
이 틈에 애셔의 침실을 다시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Vincent Valentin:(달라진 게 있을 것도 같은데. 침실 둘러본다.)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인해 더 이상의 치료를 그만둔 후 쭉 지내고 있는 곳입니다.
통증과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에 내부 청결과 안락에 힘 쓴 공간입니다.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이 창문, 책상, 책꽂이, 약물 진열장, 애셔 정도겠습니다.
Vincent Valentin:(창문부터.......)
애셔가 졸고 있는 이불보에 따스한 볕을 묻히고 있습니다.
바깥에 나갈 수 없는 애셔를 배려해 외부를 더 넓게 볼 수 있게끔 전창을 냈었죠.
아침 햇살, 아니. 점심의 따사로운 햇빛이 내부에 들어차고 있습니다.
바깥은 드넓은 푸른 하늘과 점심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로 분주합니다.
Vincent Valentin:
관찰력
기준치: |
60/30/12 |
굴림: |
3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정갈하게 늘어진 자동차들, 신호등, 일렬로 줄지어 이동하는 사람들.
여명은 염증내로 얼룩진 이불을 비추고 있어도, 결코 희망이 되진 않았으니까요.
Vincent Valentin:(그대론데? 다음은 책상.)
지금은 작은 마찰에도 통증을 호소하기 때문에 의자에 앉는 것조차 고통이어서, 과거의 부산물이 되었을 뿐입니다.
책상 위에는 애셔가 자주 사용했던 노트북과 일기장이 놓여 있습니다.
Vincent Valentin:(노트북 열어 본다.)
매끄럽게 은빛으로 뻗은 사각의 전자기기를 열자,
Vincent Valentin:(쿨하게 일기장으로 넘어간다.......)
애셔가 사고가 난 후부터 적기 시작한 일기장입니다.
검은색 가죽 케이스에 줄만 그어져 있는 가벼운 노트입니다.
되감기를 반복해도 내용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펼쳐 보나요?
Vincent Valentin:(일기장 펼쳐 본다.)
XXXX. XX. XX이렇게까지 짐이 될 생각은 없었는데.
정갈했던 단어는 점점 어그러져 우울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 덤덤한 글씨체는 문장의 형태라기 보다는 단어의 끊김으로 이루어져 있었죠.
심장에 들어찬 죄책감의 무게가 피를 빨고 거세게 전신으로 이완시킵니다.
자신의 존재를 짐이라고 지칭하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Vincent Valentin:(덮고 책꽂이 본다.)
애셔가 좋아하는 서적류로 듬성듬성 채워진 책장입니다.
외출을 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들이 종종 원하는 책들을 사다 주거나 주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통증이 이렇게 심하지 않았을 땐, 직접 목소리로 읽어주기도 했었는데.
Vincent Valentin:
관찰력
기준치: |
60/30/12 |
굴림: |
2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책들 중, 낯선 책 하나를 발견합니다.
이전 루프 때까지만해도 본 적 없는 표지의 책이었죠.
모르긴 몰라도, 어느 나라의 언어도 아닌 것 같은 문자 나열의 연속이었습니다.
Vincent Valentin:(펼쳐 본다.)
한 글자만 적혀 있었던 마지막 장에 하나의 글자가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Vincent Valentin:(쿨하게 넘어간다. 몰라서는 아니다. 약물 진열장.)
직접적인 병 치료가 불가능한 애셔의 통증 경감과 연명을 위한 약물이 진열장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마약성 진통제, 해열제, 소염제, 스테로이드.
진열장 아래에는 링겔에 바로 주사하거나 근육에 주사할 수 있는 주사기들이 채워져 있습니다.
직전엔 애셔가 여기 있는 걸 꺼내다 썼을 겁니다.
Vincent Valentin:(진열장 자세히 본다.)
Vincent Valentin:(소득이 딱히....... 다시 애셔 옆에 앉는다.)
빈센트, 당신이 지속적으로 과거에 고착된 모든 이유입니다.
그는 따뜻한 스프를 머금고 허기가 가셨는지 아직까지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가는 팔뚝에 꽂아진 링겔로 매일같이 진통제가 투여되고 있겠죠.
Vincent Valentin:(이불 걷어 본다.)
흰 이불 속에 포박된 다리가 허공에 노출되자, 염증 들끓는 시큼한 악취가 다시금 코를 찌릅니다.
검은 얼룩은 발목을 가로질러 종아리를 썩히고 있습니다.
건조한 살 표피 틈새로 검게 썩어든 그것은, 종아리를 완전히 덮었습니다.
나 추워······.
Vincent Valentin:....... 아. 미안. (다시 덮어 준다.)
Vincent Valentin:괜찮나 싶어서.
저기, 링겔에 달려 있는 버튼 좀 눌러 줄래. 아침에 진통제를 못 맞아서.
Vincent Valentin:선생님한테 여쭤 보고 해 줄게. 혹시 모르니까.......
Asher:······그냥, 해 줘. 평소에 쓰던 건데 새삼스럽게.
손끝이 링거액에 매달린 작은 기계 장치를 가리킵니다.
간병인이 자리를 비울 때 달아 놓았던 보조 기구입니다.
통증이 느껴질 때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진통제가 링거액에 섞이게 되는 장치였어요.
평소엔 애셔가 자의적으로 필요할 때 눌렀지만, 지금은 종아리까지 번진 탓에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괴로운가 봅니다.
Vincent Valentin:(음. 음....... 머뭇대다 버튼 한 번 누른다.)
Asher:(날숨.) 오늘따라 더 아픈 것 같아.
다시, 다시 잘까 싶어. 그런데, 밸런타인.
나 그대로 깨고 싶지가 않다.
Vincent Valentin:....... 약 넣었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많이 피곤한가 보다. 얼른 자. 이따 저녁 먹을 때 깨울게.
Asher:아니야. 더는 안 그래도 돼. 괜찮아.
······손 좀 빌려 줄래. 매번 내 손 가져가기만 하고.
Vincent Valentin:아니....... 아, 이래서 진통제 안 놔 주려 한 건데. 모르핀이라 너 가끔 헛소리한단 말이야.
(주위를 힐끔댄다. 당장 근처엔 자살할 수 있는 도구 같은 건 없는데. 손을 잡아 놓는 게 낫겠다....... 손 얌전히 내밀었다.)
당신의 손등을 쓰는 엄지손가락의 감촉이 미묘합니다.
피로한 음성으로 당신과의 대화를 이어나가던 애셔가 곧 낮은 웃음을 뱉습니다.
Vincent Valentin:
지능
기준치: |
50/25/10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Asher:(맞잡은 손 물끄럼 내려다본다.) 밸런타인.
나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너도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고.
이만 보내 줄래.
Vincent Valentin:네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 모든 사람이 다 너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너한테 중요한 무언가가 되게 해 달라고 했어? 내가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했어? 애셔. 에테리아.
그냥 숨만 쉬어 달라고 했잖아.......
껍데기도 괜찮으니까 남아 있으라고 했잖아.
갇힌 채로 숨만 쉬면서 같잖은 꿈이나 꾸는 건 내가 아니라고.
(잡힌 손 빼낸다.) 나한텐 너무 어렵다. 견디는 거 말야.
Vincent Valentin:알아. 알아, 애셔. 어려울 것 알아. 아는데도 부탁한 거야. 그만큼 간절하니까.......
....... 괜찮아? 얼굴이 안 좋아 보여. 너.
안녕.
검푸른 입술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허공에 맴돌던 손이 추락합니다.
포근한 이불 위로 맥 없이 내리앉은 손이 참으로도 차가워요.
그 숨소리는 참 얕고 유약하며, 상실은 지독히도 익숙합니다.
어떤 안락으로도, 평화로도, 애원으로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무력함을 비관하며 상실을 곱씹을 수 밖에 없겠습니다.
───────END.1 서른두 번째 시도 ───────
시간의 결에 마모된 당신은 다시 실패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죽음으로 당신의 곁을 달아난 이를 붙잡을 수 없었어요.
───────BAD ENDING ───────
아마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스프에 약물을 섞었을 거예요.
그 고통을 인내하기 힘겨워 당신에게 진통제를 넣어달라고 했을 겁니다.
Vincent Valentin:(아, 그래도 이번엔 나름 꼼꼼했다고 생각했는데....... 피곤한 낯으로 스프를 몇 입 떠먹는다. 인생도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네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 SE.3 서른세 번째 저녁 ───────
폐부에 밀려드는 거센 날숨에 빈센트는 깨어납니다.
훅 끼쳐오는 과호흡의 전조로 기침이 목울대를 거칠게 긁습니다.
지독하게 소독된 알콜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합니다.
새하얀 이불에 고개를 묻고 있던 빈센트가 기침하며 고개를 들자, 어두운 방 내부가 눈에 띕니다.
창문에 드리운 빗소리가 잔잔히 귓가를 간질이고 있습니다.
비 얼룩으로 잔뜩 수채된 창가에 달빛이 요요히 들어차, 예쁜 그림자들이 이불을 잔뜩 수놓았네요.
지친 기색으로 잠든 애셔의 숨소리가 드물게 가쁩니다.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인해 더 이상의 치료를 그만둔 후 쭉 지내고 있는 곳입니다.
통증과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에 내부 청결과 안락에 힘 쓴 공간입니다.
흰 벽지 옆으로 드넓게 트인 전창이 인상적입니다.
바깥을 나가지 못하는 애셔를 위한 배려였어요.
하지만, 이렇게 늦은 저녁에 바깥을 보아하니 굉장히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합니다.
나갈 수 없고, 걸을 수 없는 이가 영원히 갈망할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의 연속이에요.
옆으론, 늘 봐오던 지루한 구조의 침실입니다.
머리맡 위에서 들려온 애셔의 음성엔 뭐가 묻어 있었던가요.
역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고단함, 괴로움, 그것들로 절망한 자의 애탄······. 혹은 단순한 지겨움.
Vincent Valentin:....... 응? 뭘. 지금 몇 시야, 애셔.
Vincent Valentin:길게 잤네. 심심했겠다.
몇 번이나 죽었어?
Vincent Valentin:무슨 소리야. 꿈이라도 꿨어?
Asher:······ ······아. 그런가 봐. 요즘 부쩍 더 헷갈린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안아 줘.
Vincent Valentin:하하....... 너도 많이 피곤한가 보다. 그치.
(침대에 걸터앉아 몸 살짝 기울여 기댄다.) 좀 어때? 몸이든, 기분이든.
Asher:(머리만 툭.) 괜찮아. 눈물이 좀 날 것 같긴 해도.
그랬던 적이 없는데.
Vincent Valentin:그래애....... 왜 그럴까. 꿈이 너무 슬펐나?
Asher:무서웠지. 마음대로 끝낼 수 없다는 게.
괜찮아. 꿈이니까.
무슨 꿈인진 모르겠는데, 아주 악몽이었나 보다. 계속 누굴 부르면서 앓던데,
밸런타인, 밸런타인.......
하하.
Asher:네가 날 미워했었나 봐. 미련이 사라지길 바랄 때면 그렇게 부르는데.
Vincent Valentin:난 널 자주 미워하는데, 에테리아.
Vincent Valentin:그럼. 미워서 죽어 버릴 것 같아.......
Vincent Valentin:나한테 미쳤냐고 했잖아, 애셔.
Vincent Valentin:(작게 웃는다. 긴 한숨.) 내가 꿈에서 뭘 했길래 미쳤냔 말이 나왔어?
Asher:죽었어. 내가 죽은 방식이랑 똑같이.
내 시체를 앞에 두고. 망설임도 없더라.
Vincent Valentin:아하하. 너무 슬펐나 보다.
너무 슬프면 미치기도 하니까.......
Asher:밸런타인, 난 네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금 넌 괜찮은 거 맞지.
Vincent Valentin:음. 안 괜찮아, 술이 없잖아.
Asher:저기에 손 소독제나 구강 청결제는 있는데.
Vincent Valentin:됐어....... 이제 짠도 못 해 주잖아.
Asher:너만 밤 좀 새고 마는 거지. 밸런타인.
산책 겸 나가서 술이나 좀 마시고 오든가.
Vincent Valentin:음, 밖에 비 오잖아. 싫어. 안 나갈래.
Vincent Valentin:난 비 안 좋아하는데.
Asher:······난 이제 맞고 싶어도 못 맞으니까. 대리 만족이라도 하려 했지.
안 나가도 돼. 괜찮아. 내 팔 좀 네 몸에 둘러 줄래. 나 힘이 잘 안 들어간다.
Vincent Valentin:(맞으면 춥기만 한데 뭐가 좋단 거지....... 어깨 위로 팔 걸쳐 준다.) 미안. 그냥 시원하게 맞고 올까?
Asher:됐어. 나 싫다는 거 억지로 시키고 그런 사람 아니다.
흐흐, 하. 밸런타인.
나 언제까지 아파야 해?
Vincent Valentin:....... 그러게. 진통제 넣어 줄까?
Asher:그런 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Vincent Valentin: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애셔.
이젠 도망칠 곳이 거기뿐이야.
네 꿈처럼 되길 바라?
Asher:나 지금 죽음밖엔 바라는 게 없어······.
네가 날 따라 죽든 말든 고려할 정신이 못 돼.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음, 으음. 이것도 또다시 꿈이라면. 깨어나고서 난 울 거야.
Vincent Valentin:그렇구나. 난 네가 사는 것밖엔 바라는 게 없는데.......
꿈이 아니야, 애셔. 그러니까 함부로 죽으면 안 돼. 현실이니까.......
Asher:나한텐 그저 다 꿈 같은데. 그러니까, 한 번만.
한 번만 져 줘.
미안해.
미안. 네 꿈에서도, 여기서도 져 줄 수가 없다.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니.
창문을 두들기는 빗줄기의 소음만이 두 사람의 공허를 가득 메웁니다.
더운 호흡이 당신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지면.
끈적한 선혈이 천천히 흘러 상의를 적셔나갑니다.
겨우 손바닥보다도 작은 살덩이가 가슴팍을 따라 구릅니다.
방은 어둡고, 애셔의 눈엔 달빛이 빛나고······.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이 뺨을 가로지름과 동시에 거친 채도로 이불까지 툭, 투둑 오염됩니다.
사죄도, 원망도 발음할 수 없는 애셔가 미소짓습니다.
코 끝엔 피비린내만 진동하고, 수십 번 들었던 작별 인사와 고해는 여전히 비탄으로 뭉쳐 당신을 괴롭힙니다.
그 생에 걸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끝이기 짝이 없습니다.
기댄 무게는 더 이상 당신을 짓누르지 않습니다.
서늘히 식어가는 체온, 답하지 않는 입술, 피로 젖어든 당신의 몸…….
어떤 안락으로도, 평화로도, 이기심으로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무기력함을 비관하며 상실을 곱씹을 수 밖에 없겠습니다.
───────END.1 서른세 번째 시도 ───────
시간의 결에 마모된 당신은 다시 실패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죽음으로 당신의 곁을 달아난 이를 붙잡을 수 없었어요.
───────BAD ENDING ───────
Vincent Valentin:(음. 주사기로 찌르는 게 제일 편했던 것 같기도 하고.......)
흐느낌조차 침묵된 고요로 가득한 그 내부에 조그만한 빛이 깜빡입니다.
애셔가 사용하던 노트북입니다. 어째서 저절로 켜진 걸까요.
비밀번호 입력 창이 있던 화면엔 이상한 내용이 떠 있습니다.
그대로 몇 초나 깜빡였을까요. 곧 화면은 다시 검어집니다.
애셔는 왜, 당신을 앞에 두고도 결국 자살한 걸까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속, 계속 떠나게 됐을까요.
Vincent Valentin:(진열장 안 주사기를 꺼내 든다. 시간은 꽤 걸려도 이 작은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간편하다. 몇 번 긁어 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이 짓도 마지막인 것 같지만.......)
─────── SE.4 서른네 번째 새벽 ───────
폐부에 밀려드는 거센 날숨에 빈센트는 깨어납니다.
훅 끼쳐오는 과호흡의 전조로 기침이 목울대를 거칠게 긁습니다.
새하얀 이불에 고개를 묻고 있던 빈센트가 기침하며 고개를 들자, 기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꼭 사람의 내장 같이 생긴 것들이 온 곳에 낀 채입니다.
두근거리며 맥동이 뛰는 양 핏대가 움직입니다.
얇은 표피 내에 혈액이 꿈틀거리는 게 끔찍합니다.
애셔는 혈관으로 헝클어진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이불 대신, 기이한 줄기들이 애셔를 감싸고 있습니다.
마치, 그 침대에서 더는 일어날 수 없게 하려는 듯이.
그 틈 어귀 사이로 애셔의 하반신이 보입니다.
하반신 전체를 감싼 기이한 상흔이 점점 더 번져 오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타고 올라 상체를 물들이려고 합니다.
나로 인해 죽더라도 괜찮아?
누구 때문이든 무슨 상관이야....... 인생이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Vincent Valentin:대체로 그랬어.
Asher:하하. 그럼 왜 여지껏 살아 있대.
Vincent Valentin:인생에 의미를 못 느끼는 것과 죽고 싶어 하는 건 달라, 에테리아.......
난 대체로 전자였고, 그게 얼마나 좆같은 상태인지도 잘 알고.......
이해가 돼? 인생이 무슨 헌신짝 같은데 죽기도 싫어서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가끔 있는 '살 만한 상태'에 안주하면서. 죽을 용기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 용기가 생겼을 뿐이고....... 그래. 그게 전과 지금의 차이지.
Asher:아, 빈센트······. 우리 너무 오래도록 가까웠나 봐. 네가 나와 같아진 걸 보면.
기억이 나지 않는 때부터 그랬어. 내 모든 단어에 의미가 없어서 죽고 싶었어. 정말, 기쁨도 슬픔도 없이 죽고만 싶었는데.
빈센트, 빈센트, 나 너무 기뻐. 왜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해야 할 건 확실하지.
같이 도망치자.
이, 개새끼.......
도망만 칠 줄 아는.......
내가 뭘 해도,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국 도망이지. 그래. 그래, 괜찮아. 이젠 괜찮아. 됐어.
이젠 나도 도망칠 수 있어. 너도 이제 도망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같이 가자니까. 나 네 뒷모습 보긴 싫은데.
Vincent Valentin:아니. 아니, 에테리아. 나 지금 너한테 화내고 있는 거야.......
우린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해야 한다고 했잖아.
너도 내 뒷모습을 봐야 해. 그럼 너도 이제 미친 새끼라곤 못 할걸.......
그걸로 뭐가 바뀌기나 할까.
······좋아, 알겠어. 또 기다려 줄게. 하고 싶은 거 해. 뒤를 돌든, 내 눈을 가리든······.
Vincent Valentin:(작게 웃고 가지런한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춘다. 이건 마지막 예의. 가끔 위로해 주고, 또 가끔 죽을 결심을 하게 해 줬던 손에게 표하는.......)
창문 좀 봐.
비 많이 온다.
(일제히 창문으로 시선이 향하면, 그 앞으로 가 문을 연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비를 왜 좋아하는 거지. 아, 비 냄새. 차갑고, 뺨도 축축하고, 그러나 이번에도, 행동엔 망설임이 없고.......)
(몸이 완전히 기울 때까지 뒤돌지 않는다. 우린 얼굴을 보지 않아야 하니까.)
Asher:(몸이 땅이 닿는 소리가 들렸다. 네 기분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아. 빠른 박동이라는 건 이렇게나 아픈 거였구나.
빈센트. 낮게 읊조렸다. 이제 미련 같은 걸 가져 줄 사람은 없으니까. 도망친 날 부를 사람도, 어쩌면 내 시간들을 기억할 사람까지. 잘 된 일이다. 웃음이 났다.)
조금 춥다. 허전해. 네가 여기 엎드려선 잠꼬대랍시고 애셔, 애쉬 에테리아, 빌어먹을 애쉬 에테리아, 개새끼야······.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럼 난 그런 네 앞머리를 간질이고······. 왜애, 빈센트.
(밤거리의 몇몇이 웅성이는 소리와 꽤 느리게 찾아온 사이렌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흐리다. 제발로 숨은 상대를 굳이 찾지 않는 건 애셔만의 불문율과도 같은데,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쉽게 되었을 뿐이지. 이왕이면 같이 도망치고 싶었어서. 차츰 투둑이는 소리만이 귀에 가득 찼다. 창문 근처엔 빗물이 고였다. 좋다. 손등에 입술을 포갠다.)
빈센트, 나 혼자서는 비 맞으러 못 나가는데.
빈센트.
─────── END5. 마지막 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