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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만 시나리오/Fade

Hold Your Breath / KPC: 파라 무어, PC: 페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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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 7th Fanmade Scenario
 
Hold Your Breath
 
피부에 선연하게 닿는 폭력적인 감각.매끄럽고 단단한 촉감에 점차 질려가는 숨.그 질식의 근원지를 향해 시야를 올리자……
 
당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어쩐지 낯선 모습의 파라와 눈이 마주칩니다.
 
KPC 파라 무어 PC 페이드
 
Written by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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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깜빡.
 
오래 감겨있던 듯 뻑뻑한 눈을 뜨면, 흐릿한 눈앞에 세계가 천천히 펼쳐집니다.
 
온통 하얀 사방과 정면에 보이는 열린 검은색 문,
 
본래보다 한참이나 낮아진 시야……
 
모든 것이 이질적일 뿐입니다. 목을 조르는 손길마저 그렇습니다.
 
……숨이 조여옵니다.
 
도대체 누가?
 
피부에 선연하게 닿는 폭력적인 감각.
 
매끄럽고 단단한 촉감에 점차 질려가는 숨.
 
떨쳐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해도, 어째서인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겨우 그 감각의 근원지를 향해 시야를 올리면,
 
당신의 위에서 당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어쩐지 낯선 모습의 파라와 눈이 마주칩니다.
 
당신과 파라를 둘러싸고, 방호복을 입은 연구원 차림의 사람들이 여럿 서 있습니다.
 
자신이 쥐고 있는 당신의 목을 한 번,
 
아마도 자신을 향하고 있을 당신의 눈가를 한 번 바라 본 파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침묵하다가 입을 엽니다.
 
파라 무어:내가 누군지 알겠어?
 
그는 목을 조르는 힘을 덜지도 않은 채, 숨이 졸린 목으로 무슨 말이라도 뱉어보라는 듯 당신을 채근합니다.
 
페이드:(고개 천천히 끄덕인다.)
 
파라 무어:입은 뒀다 어따 써. 대답을 해 봐.
 
페이드: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제 목 쥔 손목 잡는다.)
 
파라 무어:……흠. (손아귀에 힘을 더 줬다가,)
 
몇 초 후 파라의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의아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낯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목을 내리누르던 손에 힘을 풀고는 중얼거립니다.
 
파라 무어:……잘 된 건지 잘못된 건지 모르겠네.
 
페이드:(목 붙잡고 몇 번 기침한다.) 뭐가.
 
파라 무어:상관없나? (여전히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있어 봐. 잠깐.
 
페이드:싫은데. (일어날 수 있나?)
 
파라 무어:말 더럽게 안 듣지……
 
일어나 볼까요?
 
페이드:(일어나서 열린 문 쪽 향해 간다.)
 
당신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휘청거리며 다리 쪽에 힘이 빠집니다.
 
약이라도 맞은 건지.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평소대로라면 파라가 목을 조른다고 순순히 졸리고 있을 당신이 아니니까.
 
파라는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주워 들어, 안전 장치를 풀고……
 
“뭐야,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
 
당신 주변에 있던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난사합니다.
 
두 명은 총에 맞아 쓰러지고, 나머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칩니다.
 
파라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도망치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당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밉니다.
 
파라 무어:일어나.
 
페이드:내가 헛것을 보나?
 
파라 무어:아닐걸. 볼이라도 꼬집어 보든가.
 
페이드:뺨 대 봐.
 
파라 무어:야, 네 볼.
 
페이드:(파라 얼굴 향해 손 뻗는다.)
 
파라 무어:(얼굴 찌푸리며 손 쳐낸다.) 안 일어날 거면 계속 거기 누워 있든가.
 
페이드:……. (그냥 본인 볼 꼬집는다.)
 
아픈……가?
 
감각이 애매합니다.
 
아주 통증이 없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저려 오지도 않는……
 
파라 무어:아프냐?
 
페이드:모르겠어. (제 손목 손톱으로 깊게 찌른다. 아픈가?)
 
아까보다는 조금 더 확실히 아픈 것 같습니다.
 
페이드:역시 모르겠는데. (구라. 손 한 번 털고 자력으로 일어나길 시도한다.)
 
파라 무어:모르겠으면 한 대 쳐 줘?
 
 ✷ 건강 판정 ✷ 
 
페이드:
건강
기준치: 50/25/10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어디선가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었습니다.
 
파라의 도움 없이도 알아서 두 다리로 자립하고 설 만합니다.
 
페이드:(보란듯 미소짓는다. 고작 일어선 것 갖고?)
왜 쐈어?
 
파라 무어:……허. (황당하게 보다가 손 거둔다.)
방해되니까. 왜, 너도 쏠 것 같아?
 
페이드:못 쏘지 않아? (총구 잡아 어깨에 가져다댄다.)
 
파라 무어:아직 안전 장치 안 걸었는데 이건 무슨 깡이지.
 
페이드:확신이지.
…………빨리 걸어.
 
파라 무어:…… (총구 어깨에 꾹 누른 채로 방아쇠에 손가락 건다.)
무슨 확신?
 
페이드:넌 내가 원하는 대로 절대 안 해 줄 거란 확신.
 
파라 무어:그런 거면 나도 확신이 있는데.
 
페이드:또 뭐.
 
파라 무어:넌 나한테 총 맞는 것따위는 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페이드:(짧은 탄식. 그리고 총구 심장께로 옮긴다.)
누가 손해일까.
 
파라 무어:(얼굴 찌푸리고는 손가락 움찔한다. 손이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가.)
……씨발. (총구 휙 치운다.)
 
페이드:(두어 번 작게 끊어 웃는다.)
간절했어? 사람까지 죽일 정도면.
 
파라 무어:간절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다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으니까. 가능성은 없애는 게 낫지.
……적당히 정신 차리면 나와. 먼저 간다.
 
그리고 파라는 몸을 돌려 문으로 나갑니다.
 
활짝 열린 검은색 문과,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 둘.
 
당신은 이 방에 홀로 남겨집니다.
 
 ✷ 이성 판정 ✷ 
 
페이드: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5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치 1 감소
 
저린 온몸에 아주 느리게 피가 돕니다. 머리에도 그제야 피가 도는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해봅시다. 무언가 이상해요.
 
파라가 원래 저런 사람이었던가요? 방해된다고 사람을 쏴 죽이는?
 
분명 저번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 ……
 
그게 언제였죠?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요. 그러고 보면 파라의 머리칼은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습니다.
 
어쩐지 목소리도 좀 더 잠겨 있었던 것 같고,
 
얼굴도 더 피곤에 찌들어 있던 것 같고……
 
상황이 비로소 눈 안에 제대로 들어옵니다.
 
당신은 흰 독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고, 온통 흰 바닥과 벽은 군데군데 피가 튀어 있습니다.
 
바닥에는 시체 두 구가 엎어져 있는데……
 
……어라? 하나가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페이드:(어? 일단 가서 못 움직이게 밟는다.)
 
어딜 밟았을까요?
 
페이드:(어디가 꿈틀거렸지?)
 
그냥 몸이 전체적으로……
 
움찔했었습니다.
 
페이드:(상체 한가운데를…….)
 
페이드가 상체를 지그시 짓밟자, 총에 맞은 상처에서 피가 울컥 흘러 나옵니다.
 
방호복 얼굴 창 부분에 김이 서려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는 불쌍할 정도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습니다.
 
연구원: 도, 도와줘…… 살려줘!
 
페이드:어? (발 슬쩍 뗀다. 연구원 앞에 쪼그려 앉고.)
왜 살아 있어?
난 너 죽은 줄 알고 밟았는데.
 
연구원: (숨을 몰아쉰다.) 제, 제발, 살려줘.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젠장!
그 새끼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개같은……
 
페이드:누굴 믿어? 파라?
 
연구원: 그래, 아까 너랑 대화하던 그 여자!
 
페이드:걜 왜 믿어?
 
연구원: 그야 그 여자가, 그 여자가 우릴……
(쌕쌕거리다가,) 너는 어떻게 아직도 멀쩡한 거지?
 
페이드:…….
음.
내가 멀쩡한 게 불만이야?
 
연구원: 말이 안 되잖아! 지금까지 처분한 실패작들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정말 성공한 건 맞나?
 
페이드:연구원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면 쓰나. 어땠으면 좋겠는데?
 
연구원: 너도 실패작이어야지. 그래야 그 여자도 절망을……
 
고통에 씨근덕대던 사람의 신음이 잦아듭니다.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더는 미동이 없습니다.
 
페이드:(연구원 손 한 번 들어 봤다가 툭 떨군다.)
또 실패했다고 말해 볼게. 절망하는 것 좀 보자…….
(방 둘러본다.)
 
이제 움직이지 않는 시체 두 구를 제외하고는 그저 하얀 방일 뿐입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아까 전부터 계속 어디선가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 듣기 판정 ✷ 
 
페이드:
듣기
기준치: 40/20/8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지만, 툭, 툭, 하는 소리입니다.
 
이 방 안에 갇힌 당신이 마치 실험 쥐라도 된 것 같지 않나요?
 
본능적인 불쾌감이 정신을 갉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움직이는 데 제약도 사라진 것 같으니, 파라나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여기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가 전부니까요.
 
페이드:좋지 않네. (문으로 나간다.)
 
페이드가 문가로 접근하면, 천장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내립니다.
 
작은 쪽지 같은 크기에, 「O」라고 적혀 있습니다.
 
동그라미 하나입니다.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페이드:(빤히 보다가 그냥 두고 간다.)
 
.
 
.
 
.
 
문을 나서면 바깥은 벽이 전부 거울로 이루어진 복도입니다.
 
난잡하게 반사하는 광경 탓에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거울이고 벽인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천장의 밝은 조명이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춥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복도에는 조형물이 주르륵 세워져 있습니다.
 
마네킹이 일렬로 정렬된 와중에, 가장 끝에는 다시 검은색의 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페이드:누구 취향이래. (미간 찌푸렸다. 거울 유심히 본다.)
 
단순히 곧은 직선의 복도인데도, 거울로 이루어진 탓에 곳곳으로 사물이 반사되어 보입니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어쩐지 이질적입니다.
 
그야 목에는 딱 파라의 손 크기만한 멍이 시퍼렇게 올라오고 있으니까요.
 
아까 파라가 목을 조르면서 생긴 거겠죠.
 
하지만 떠올려 보면, 파라가 목을 졸랐을 때도 그렇고,
 
당신이 스스로 볼을 꼬집고 손목을 눌렀을 때도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목이 졸린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렇게까지 세게 목이 졸렸다고요.
 
하지만 아직까지 느껴지는 통증은 거의 없습니다.
 
페이드:(고개 들어 흔적 손으로 쓸어 본다.) 모르겠는데…….
새 이능력 부작용인가? 별……. (마네킹 살펴본다.)
 
총 열 개의 마네킹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습니다.
 
모두 아케르나르의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체구는 6피트를 조금 넘어 보이네요.
 
군복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모습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페이드:……정신 나갔나? (그 중 하나 툭 쳐 본다.)
 
마네킹은 힘없이 툭 밀려납니다.
 
페이드:(부술 수 있나?)
 
부술까요?
 
페이드:(하나 부숴 본다!)
 
페이드가 마네킹 하나에 손을 대보면,
 
당신은 그 피부 아래 미약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돌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요.
 
마네킹이 바닥으로 엎어지며 산산조각 나서 부서집니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는 와중에, 그 사이에는……
 
마치 당신이 쓰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가면이 흩어집니다.
 
절반이 부서져 있는 것까지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페이드:그럼 진짜로 살아 있는 건 아닌 건가.
난 여기 있으니까? (마음 놓고 나머지 전부 부순다.)
 
그럼 이 마네킹은 모조리 가짜일까요?
 
당신이 손을 대는 족족 마네킹은 부서져 사라집니다.
 
그중 어떤 것은 살점과 피가 흥건하게 바닥에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퍽 기분 나쁜 모습입니다.
 
 ✷ 이성 판정 ✷ 
 
페이드:
SAN Roll
기준치: 69/34/13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이성치 1d2 감소.
 
페이드:2
 
이성치 2 감소.
 
꼭 대량 살인이라도 저지른 듯한 모양새네요.
 
페이드:진짜 범죄자 된 것 같고 좋네. (안 좋다. 손에 묻은 피 대충 털어내고 문 향해 다가간다.)
 
문은 아주 단단해 보이며, 잠금장치는 보이지 않습니다.
 
「Memoria」라고 적힌 고급스러운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페이드:싫은 것 투성이군. (문 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눈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거대한 서재가 눈에 들어옵니다.
 
싫은 것 투성이인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 곳일까요?
 
방의 한가운데 마구잡이로 흩어진 처참한 시체 더미가 보입니다.
 
그 앞에서 태연하게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서 있는 건 파라입니다.
 
이건 또다른 ‘싫은 것’이겠네요.
 
페이드:(쟤만 없으면 완벽했을 텐데.)
(무시하고 서재 둘러본다.)
 
파라 무어:……생각보다 금방 왔네.
 
창백한 얼굴 위로는 피가 번진 건지, 홍조가 도는 건지 알 수 없는 붉은 빛이 번집니다.
 
서재는 파라 뒤에 쌓인 시체 더미를 제외하곤 평범해 보입니다.
 
당신 키의 몇 배에 미치는 책장이 즐비하고, 바닥에는 검은색 러그가 깔려 있습니다.
 
당신이 서 있는 서재 입구 맞은편에는 사무실을 연상하게 하는 책상들이 보이고요.
 
높은 천장 벽에는 큰 시계가 붙어 있습니다. 돌아가며 차칵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페이드:좀 더 천천히 올 걸 그랬나. (책장 올려다본다.)
 
파라 무어:그러게.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
 
아주 높은 책장들입니다. 책장 구석구석 방향제가 놓여 있지만,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감각이 둔해진 탓일까요?
 
책은 의학, 생명공학, 화학 전공 서적부터 시작해 신화, 업무 서류 파일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입니다.
 
살피다 보면 중간중간 튀어나온 책들이 보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뽑아 든 책일까요?
 
페이드: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그랬어. (튀어나온 책 중 하나 뽑는다.)
 
파라 무어:네가 성가신 거야. 아, 짜증 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주로 생명공학, 혹은 Myth라는 단어가 앞머리에 붙은 책들입니다.
 
유난히 두꺼운 [Myth of ■҉̨̘̟͙̲̥̗̩̰̀̓̐̕■̶̪̥͉̤̲̠̬͕̎̔̂͂́͜͞■̵͙͚͚҇̇̅̊͜■҈̡̱͓̯̐̅͠ͅ]이라는 책이 눈에 띕니다.
 
페이드:목 졸린 건 난데 심지어 성가시단 말까지 듣네. 아, 억울해……. (눈에 들어온 책 꺼내서 펼친다.)
 
파라 무어:어쩌라고. 안 죽였잖아.
 
페이드:왜 안 죽였어?
 
‘Myth of’ 이후의 언어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내용 역시 세계 각 국어와 더불어 짐작조차 가지 않는 언어가 섞여 있습니다.
 
지금은 읽을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파라 무어:그게 왜 궁금한데?
 
페이드:원래 좀 호기심이 많은 편.
 
파라 무어:살려줘도 말이 많네.
그냥 놔둘 걸 그랬나……
 
페이드:닥칠까?
 
파라 무어:그래 줄래?
 
페이드:싫어.
 
파라 무어:그럴 줄 알았다, 개자식……
 
페이드:(파라 손에 들린 책 뺏는다.)
 
파라 무어:(뒤로 감춘다.) 아직 움직이기 그렇게 편하지 않을 텐데 관두지?
야, 나 지금 기분 되게 안 좋으니까 시비 털지 마.
 
페이드:언젠 좋으셨나. (그냥 스쳐 시체더미 본다.)
 
파라 무어:지금 유독 더 구리다고.
 
당신이 그 흰 방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시체들은 하나같이 방호복을 입고 있습니다.
 
여긴 대체 뭘 하는 곳일까요?
 
페이드:왜, 나 때문에?
 
파라 무어:……따지고 보면. 결론적으로는.
 
페이드:좀 애매하네.
얘들도 다 방해돼서 죽였어?
 
파라 무어:……
 
파라는 대답하지 않지만, 살펴보면 시체에는 전부 총알 구멍이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페이드:원래 이랬던가, 너.
 
파라 무어:내가 뭐.
 
페이드:사람들 서슴없이 죽이는 사람이었냐고.
지명수배는 얘가 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
 
파라 무어:너한텐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다.
별로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야. 네가 이제 와서 모르는 사람 동정할 것도 아니고. 신경 꺼.
 
페이드:난 중요해?
 
파라 무어:시비 털지 말랬다……
 
페이드:응?
 
파라 무어:내 손에 총이 있는데 왜 깝치지?
 
페이드:내 손엔 되게 두꺼운 책이 있는데?
 
파라 무어:총이 빠르겠냐, 책이 빠르겠냐?
 
페이드:총이 빠르겠지. 쏠 거야?
쏴 봐. 야, 이 정도로 사람 쏘고 다녔으면 나 하나 쏜 건 기억에도 안 남을 텐데.
 
파라 무어:……
넌 그 정도로 테러하고 다녀서 나 하나 다친 건 기억에도 안 남았어?
 
페이드:테러 같은 거 안 했어도 기억에 안 남았을 걸.
 
파라 무어:지랄하네……
 
페이드:…….
나 중요해?
 
파라 무어:아니. (다른 곳 쳐다본다.)
 
페이드:(침음.)
나도. (물러난다.)
(시계 물끄럼…….)
 
파라 무어:알아.
넌 이제 와서는 대용품 정도야. 그게 사라졌으니 아쉬운 대로……
……어떻게든 되겠지. 멋대로 쑤시고 다니는 건 상관없는데, 제발 천천히 좀 다녀라.
 
파라는 그 말을 끝으로 등 뒤에 있던 다른 문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곧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 문도 검은색이네요.
 
시계는 거대한 금색으로, 시침과 분침, 초침의 구분 없이 오직 한 개의 바늘만이 정각을 향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바늘은 현재 숫자 11을 한참 지나는 중입니다.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숫자 12를 향해 나아가고 있네요.
 
숫자 12 아래 작은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완전한 종말과 재림」
 
페이드:사이비? (갸우뚱. 쪼그려 앉아 러그 본다.)
 
애가 사이비에 빠졌나……
 
푹신하고 부드러운 양털 러그입니다. 시체 더미가 올려져 있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겁니다.
 
시체 더미를 치우려면 근력 판정이 필요합니다.
 
페이드:(별로 손 대기 싫다. 그냥 책상이나 본다.)
 
사무실의 파티션처럼 책상들이 구획을 나누고 놓여 있습니다.
 
아, 이제 보니 책상에도 앉은 채로 엎어진 시체가 있네요.
 
공통적으로는 책상 위에 저마다 작은 액자가 놓여 있습니다.
 
저기 파라의 책상으로 추정되는 책상도 있군요.
 
페이드:아니, 미친, 얼마나 쳐 죽인 거야? 나가면 신고해야겠다. (액자 본다.)
 
액자에는 둘, 혹은 세 사람씩이 찍혀 있습니다.
 
대부분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아 소중한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인 것 같습니다.
 
다만 사진 밑에는 어떤 날짜가 함께 적힌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사진에 기록할만한 날은 얼마 없습니다.
 
생일, 어떤 기념일,
 
혹은 기일 정도.
 
…… ……
 
만약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이 주변에 죽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면, 파라는?
 
페이드:(모르는 새 안드레아가 죽었나? 들려온 소식은 없었는데. …….)
(파라 책상 본다.)
 
파라의 이름이 붙은 책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 사납게 메모지가 붙어 있고, 두꺼운 노트와 알 수 없는 기계 장치, 그리고 책상 하단에는 커다란 서랍이 하나 보입니다.
 
페이드:액자는 없나? (메모지 본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습니다.
 
옆에 특이 사항도 함께 메모되어 있는데, 대충 보면 쉘터 내에서도 손 꼽힐 정도로 저명한 과학자, 수학, 의사, 생명학자, 천문학자 등……
 
다양한 직종의 지식인들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누군가는 딸을, 누군가는 배우자를, 누군가는 친구를,
 
그 모든 사안은 건조한 필체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페이드:못 쓴다. (두꺼운 노트 펼쳐 본다.)
 
두꺼운 노트를 펼쳐 보면,
 
이쪽은 더 못 썼습니다.
 
무언가의 정보를 생각나는 대로 휘갈겨 적어 둔 것처럼 쉽게 알아보기 힘듭니다.
 
 ✷ 자료조사 판정 ✷ 
 
페이드:
자료조사
기준치: 40/20/8
굴림: 58
판정결과: 실패
바네사는 애 글씨 연습도 안 시키고…….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겠지만……
 
엉망인 글씨체 사이로 겨우 몇 자를 읽어 봅니다.
 
핸드아웃 공개.
 
페이드: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덮고 기계 장치 살핀다.)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의 기계입니다.
 
페이드가 읽은 숱한 책이나 과학 잡지 중 어디에서도 본 적 없습니다.
 
투명한 원 모양의 유리가 중심에 있고, 그 뒤로 금속 휠들이 잔뜩 붙어 있습니다.
 
기계 장치에는 메모지가 한 장 붙어 있습니다.
 
페이드:(메모지 본다.)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사용법: 알 수 없는 언어를 원 안에 비추면 번역한다.
 
혹은,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침 페이드가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적힌 종이가 한 장 밑에 깔려 있는데요.
 
시험해 볼까요?
 
페이드:(시험해 보자! 종이를 주워 비춘다.)
 
읽을 수 없던 언어가 원 안에서 점점 영어의 형태를 가집니다.
 
번역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들에게 지구는 특별하게 맛있는 먹잇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입맛에 맞추기 위해 변환 과정을 거치는데, 대표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바꾸는 것이 있다.
 
페이드:(방금의 노트 한 장 찢어 적어 비춘다. 바뀐 조건엔 어떤 것들이 있지?)
아, 이건 안 비춰도 되나?
(거둔다.)
 
노트는 잠잠합니다.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언어가 적힌 문서에만 반응하는 것 같은데요.
 
그런 게 이 서재에 하나 더 있지 않았던가요?
 
페이드:그냥 빈 페이지는 안 된다? (종이 잘게 찢어버리고 그 두꺼운 책 꺼내 빈 페이지 찾는다.)
 
글자가 빼곡한 페이지를 좀 넘기다 보면, 글씨를 쓸 정도로 여백이 빈 페이지가 보입니다.
 
페이드:(같은 내용 적는다.)
 
글자를 적은 뒤, 기계 장치로 책을 비추면……
 
읽을 수 없던 언어가 원 안에서 점점 영어의 형태를 가집니다. 다시 한 번요.
 
페이드:(내용 본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자의로 존재를 결정하고 싶은가?」
 
반대쪽 페이지는 대답을 기다리듯 비어 있습니다.
 
페이드:이건 내가 물어 본 게 아닌데? (일단 그렇다고 적는다.)
 
글자가 흩어지더니 이내 새로운 글자가 떠오릅니다.
 
「인류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이 달라질 것이다.」
 
「발밑을 보라.」
 
페이드:(고개 숙여 본다.)
 
페이드의 발밑에는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스위치가 하나 보입니다.
 
눌러 볼까요?
 
페이드:누르면 여기 터지나? (누른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러그 위로 쌓여 있던 시체 더미가 무너집니다.
 
아무래도 러그 아래에 무언가 장치가 있는 것 같은데요.
 
페이드:(러그 치울 수 있나?)
 
치울 수 있습니다.
 
페이드:(러그 치운다.)
 
러그를 걷어내고 보면, 옅은 빗금이 보입니다.
 
사람 하나가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네모난 빗금입니다.
 
누가 봐도 비밀 문이네요.
 
문은 살짝 들려 있습니다.
 
페이드:(문 슬~쩍 연다.)
 
살짝 열어보면 그 아래로는 칠흑 같은 공간이 보입니다.
 
폭이 좁고 단이 높은 계단이 펼쳐져 있습니다.
 
페이드:나중에 갈까. (파라 책상에 있던 서랍 연다.)
 
서랍에는 볼펜만 가득하게 쌓여 있습니다.
 
페이드:(볼펜 하나 슬쩍한다.)
 
쌔볐습니다.
 
페이드:(사이로 깊게 손 넣어 볼펜 더미 헤집는다. 별 거 없나?)
 
진짜 별 게 없습니다.
 
페이드:별 거 없는 놈. (바닥에 있던 문 열고 들어간다.)
 
계단을 따라 컴컴한 어둠 속을 향해 들어가면, 당신의 걸음을 따라 양옆에서 등불이 켜집니다.
 
약간 눅눅한 공기. 오한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양옆 벽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아가지 않은 저 너머는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탓에 끝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벌레 기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서늘한 적막만이 유지되는 어둠.
 
벽을 더듬으며 나아가노라면,
 
어느 순간부터 손에 닿던 고른 금속의 느낌 대신에 우둘투둘한 쇠창살이 손에 닿기 시작합니다.
 
페이드:……? (쇠창살 살핀다.)
 
그 너머에는 흐릿한 형체가 가득합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천장에 당겨서 불을 켤 수 있는 스위치가 길게 내려와 있습니다.
 
페이드:저것도 시체인가? (스위치 당긴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창살 너머의 공간에 불이 환하게 들어옵니다.
 
쇠창살 너머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빛이 비추어진 그 너머에는,
 
저것도 시체인가요?
 
아뇨. 아닙니다.
 
그곳에는 벌거벗은 인간들이 동산을 이루듯 쌓여 있습니다.
 
 ✷ 이성 판정 ✷ 
 
페이드:
SAN Roll
기준치: 67/33/13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이성치 1 감소.
 
 ✷ 관찰 판정 ✷ 
 
페이드:(아니 별로 그렇게 유심히 보고 싶진 않은데.)
관찰력
기준치: 40/20/8
굴림: 2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좀 자세히 보면,
 
저건 진짜 인간이 아닙니다. 다행이죠.
 
오히려 더미에 가깝습니다.
 
엉성하게 마감된 손가락 부분이나 얼굴이 없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페이드:(그럼 어떤 변태가 나체 더미를 저렇게 동산처럼 쌓아 둔 건지?)
 
하지만 저렇게 많은 더미가 왜 저 너머에 쌓여 있나요?
 
그 조금 옆에 커다란 흰 침대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 침대는 기계 장치들에 둘러싸여 있으나, 침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페이드:(기계 장치 본다.)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료 장치들입니다. 그 수는 굉장히 많습니다.
 
심지어 단순히 물건을 모아둔 게 아니라,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 배치해 둔 것 같습니다.
 
 ✷ 지능 판정 ✷ 
 
페이드: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가만히 기계 장치를 살펴보자면, 저것들은 생명 유지 장치보다는 시체를 보존하는 장치에 가까워 보입니다.
 
문득 당신은 대용품이라던 파라의 말이 떠오릅니다.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말도요.
 
그렇다면 무엇이?
 
저 침대 위에는 뭐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어디로 간 걸까요?
 
…… ……
 
쇠창살은 몇 미터를 더 이어지다가 이내 다시 금속 벽으로 돌아옵니다.
 
마지막 등불이 켜지고,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입니다.
 
페이드:끝인가? (올라간다. 방금 그 더미와 내가 부순 마네킹 간의 연관성이 보였을까?)
 
굳이 따지자면 마네킹과 더미이니 비슷해 보일 수는 있습니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검은색 문이 보입니다.
 
잠겨 있지 않고, 너머에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요?
 
페이드:(일단 열고 나간다.)
 
.
 
.
 
.
 
검은 문을 활짝 열면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내내 어둡던 통로에 있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반짝이는 조명의 불빛, 은은하게 풍겨오는,
 
이게 무엇의 향기였죠?
 
갑작스럽게 치솟는 감각의 잔재에 혼란스럽기도 잠시.
 
둘러보면 이곳은 삭막하기 그지없는 방입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걸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꾸며져 있지 않습니다.
 
꼭 누가 쓸법한 방이네요.
 
페이드:파라? (다른 문은 없나?)
 
방금 당신이 열고 나온 바닥 문을 제외하면, 왼쪽 벽과 오른쪽 벽에 하나씩 문이 있습니다.
 
페이드:(둘 다 열어 본다.)
 
왼쪽 문을 열면 아까 봤던 그 서재가 나옵니다.
 
파라가 아까 열고 들어갔던 게 이 문이겠군요.
 
오른쪽 문을 열면 처음 보는 탁 트인 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 같네요.
 
페이드:(방 안에 공책 같은 건 없나?)
 
있습니다.
 
방에는 책장과 책상침대옷장 등 평범한 일상 공간에 쓰이는 가구들이 있습니다.
 
페이드:(책장 본다.)
 
깔끔한 검은색 책장입니다.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으며, 한 권의 책만이 가로로 올려져 있습니다.
 
대부분 읽기 힘든 제목이거나, 생명과학과 공학, 신화서입니다. 서재와 비슷한 구성이니 굳이 이것들은 읽을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모든 책은 한참 읽은 듯 책 끝부분이 너덜거리고 손이 탄 흔적이 있습니다.
 
페이드:(가로로 올려진 책 펼친다.)
 
표지의 어느 면에도 제목이 없는 책입니다.
 
핸드아웃 공개.
 
읽으면 어쩐지 정신이 어지러워집니다.
 
 ✷ 이성 판정 ✷ 
 
페이드:
SAN Roll
기준치: 66/33/13
굴림: 5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치 감소 없음.
 
문단 아래에는 메모지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페이드:(메모지도 본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숨을 나눌 상대가 먼저 죽어버린다면, 그 상대의 복제품을 만들어 대신할 수 있는가?
 
복제품이라도, 박제하여……
 
페이드:…….
난 안 죽었는데. (책상 본다.)
 
회색 모노톤의 딱딱한 철제 책상입니다.
 
모니터가 놓여 있고, 비스듬하게 내려 놓아진  한 권과 깔끔하게 정리된 필기도구가 보입니다.
 
페이드:(모니터 켜 본다.)
 
8개 구역 상황을 비추고 있는 CCTV입니다.
 
당신이 처음 깨어났던 하얀 방을, 벽이 모두 거울이던 복도를,
 
서재를, 서재의 시계를, 지하통로를,
 
그리고 화원처럼 보이는 곳의 입구와 검은색으로 가득 메워진 화면을 비추기도 하고,
 
마지막으로는 하얗게 눈이 내리는 하늘이 보입니다.
 
……쉘터에 눈이요?
 
의아해하기도 잠시, 화원을 비추던 화면에서 움직임이 감지됩니다.
 
파라의 모습입니다.
 
화원 안으로 들어가는 게 모니터로 잡히고, 그 이후 동선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
 
페이드:눈이 왜 내려? (무너지기라도 했나? 책 펼친다.)
 
아, 이 책은 아까 서재에서 그가 들고 있던 책입니다.
 
검은색 하드 커버로 제목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책을 열어보면, 페이드는 이것이 책보다는 일기장에 가까운 기록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악필은 익숙합니다.
 
내용을 읽을까요?
 
페이드:(천천히 읽는다.)
 
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종말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굳이 우주적 단위의 종말이 아니더라도 너무 쉽게 사라지고 죽는다.
 
그래, 이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숨을 맞출 수 있었는데 눈앞에서 놓쳤다. 곳곳에 흔적만이 남았다.
 
그가 놓쳤다는 대상은 이름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당신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건 당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하지만 당신은 버젓이 이곳에 있는데, 왜 그는 당신이 죽은 것처럼 일기를 적었을까요.
 
내용을 계속 읽을까요?
 
페이드:숨을 맞추는 게 뭔데……. (계속 읽는다.)
 
내용은 천천히 이어집니다.
 
■■를 통해 ‘그’를 만났다.
 
그는 죽은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수락했다.
 
자기만족이라고 해도 좋다. 죽은 이를 돌려낼 방법이 있다는 말로 날 도울 지식인들을 끌어들였다.
 
이대로 무력한 종말을 맞이할 수는 없다.
 
내가 살든지, 그 새끼가 살든지……
 
어느 쪽이든 그건 온전히 너와 내 선택이어야지.
 
개입 없이 결론을 내자. 도망치지 마. 네 입으로 패배를 인정해.
 
…… ……
 
5년 간 더미를 수백 개는 만들었는데, 그중 그 새끼와 그나마 비슷한 건 고작 열 개다.
 
그마저도 불안정해 말을 걸면 금방 부서지고, 가면 안쪽은 구현하지도 못했다. 모르니까 당연한가.
 
결국 가짜란 것만 날마다 더 확인받는다.
 
‘그’가 알려 준 대로 했는데 자꾸만 판별대는 X를 뱉어낸다.
 
숨 막는 것도 없는데 숨이 막힌다. 지치는 것 같기도 하다.
 
…… ……
 
창조, 실패, 재창조, 실패, 모방, 실패, 실패, 실패…… 등이 아프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네가 누구였는지도 기억 안 나.
 
아니, 너무 선명히 기억하니까 문제인 거겠지.
 
매일 밤 등이 아프다. 어쩌면 온몸이.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에는 잉크가 마르지 않은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실패작이라도 상관없다. 멸망이 코앞이다.
 
시체도 이제 와서 흩어진 걸지도 몰라. 오래 버텼다, 그래.
 
그러니 네가 누구더라도, 아직도 완벽히 자유로운 소실을 원한다면,
 
날 찾으러 와.
 
내가 널 찾아 헤맸던 것처럼.
 
혼란스러운 낱말이 이어진 가운데 기록이 끊깁니다.
 
책 아래에는 CD가 두 장 깔려 있습니다.
 
페이드:어차피 멸망할 세상이라면…… (CD 본다.)
 
각각 [인터뷰]와 [리허설]이라고 적힌 CD입니다만, CD를 플레이할 수 있는 기기가 없으므로 다른 곳에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일기장의 내용은 대체 뭔가요.
 
미친 것과 다름없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멀쩡히 숨을 쉬고 있는데, 그는 당신을 소생시키라도 하려는 듯 적혀 있습니다.
 
정말 당신은 한때 죽은 존재인가요?
 
 ✷ 이성 판정 ✷ 
 
페이드:
SAN Roll
기준치: 66/33/13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이성치 1D3 감소.
 
페이드:3
 
이성치 3 감소.
 
 ✷ 지능 판정 ✷ 
 
페이드: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4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지하통로에서 보았던 빈 침대.
 
무언가가 사라졌고, 당신은 그 대용품이라던 파라의 말.
 
그곳에 당신의 시체가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흩어져야 마땅한 흔적이었을 텐데.
 
그럼 지금 이곳에서 숨쉬고 있는 당신은 그가 만들어 낸 모조품에, 대용품에 불과한가요?
 
그렇다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기도 합니다.
 
페이드:……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 (침대 본다.)
 
일기장에는 5년 동안 더미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니, 최소 5년이겠군요.
 
흰색 침구가 가지런히 정리된 1인용 침대입니다만, 사용감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자지 않은 것처럼요. 다만 은은하게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페이드:음. (보기 싫어졌다. 옷장 연다.)
 
검은색 옷장입니다. 열어보면 그가 평소에 입던 스타일의 옷들이 걸려 있습니다.
 
셔츠나 목폴라, 바지 등이네요.
 
 ✷ 관찰 판정 ✷ 
 
페이드:
관찰력
기준치: 40/20/8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뭐 이렇게 검은 게 많지?
 
사방이 검은색 투성이입니다.
 
옷의 양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옷장 벽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네요.
 
페이드:(옷 헤집어 본다.)
 
옷을 헤집어 보면……
 
벽쪽에 뭔가 빼곡하게 붙어 있습니다.
 
페이드:(그냥 옷 다 꺼내서 바닥에 둔다.)
 
옷을 전부 빼내고 보면 옷장 형태가 고스란히 보입니다.
 
벽에는 뉴스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습니다.
 
전부 당신이 나온 기사입니다.
 
당신도 읽어 본 적 있는 것부터,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신문사의 기사까지.
 
당신이 남겼던 모든 자취가 고스란히 이 벽에 박제되어 있습니다.
 
페이드:아. …….
(다 뜯어내 찢는다.)
 
힘없이 종잇조각들이 뜯겨 나갑니다.
 
페이드:(전부 그대로 두고 오른쪽 문으로 나간다.)
 
방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
 
.
 
.
 
오른쪽 문을 열고 나오면 탁 트인 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또다시 피냄새가 흥건합니다.
 
바닥에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습니다. 전부 죽었습니다. 서재와 같이요.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고, 벽에는 고급스러운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습니다.
 
높은 벽 상단은 스테인드글라스입니다.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따라 바닥에 아름다운 색색의 형상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정면에는 검은색 정문이 있습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입니다.
 
아마 화원으로 이어지는 문이겠지요.
 
페이드:……이 정도면 테러 아니야? (그림 본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죽이고 다닐 생각인 걸까요.
 
세 점의 그림이 있습니다. 양팔을 벌려도 잡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그림입니다.
 
하나씩 살필까요?
 
페이드:(왼쪽부터 본다.)
 
첫번째 그림은 물컹물컹한 점액질에 선명한 분홍빛 뇌가 담겨 있습니다. 극사실주의 화풍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두번째 그림은 수많은 인간을 밟고, 단 하나의 인간만이 위에 올라서 하늘을 향해 양팔을 뻗고 있는 그림입니다. 추상주의 화풍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마지막 그림은,
 
당신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입니다.
 
얼굴이라고 해봤자 절반이 가려져 있지만요.
 
심지어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열한 명이나 그러져 있습니다. 과하네요.
 
모두 무표정하게 정면을 보고 있는 것이 으스스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페이드:(진짜 과한데?)
이거 뭐…… 어떻게 해야 하나.
(찢을 수 있나?)
 
찢고 싶나요?
 
페이드:(어떻게든 부수고 싶다.)
 
저 큰 그림을?
 
찢을 만한 무기나…… 수단이 있을까요?
 
페이드:(없다…….)
(시체 뒤져 볼 수 있나?)
 
시체를 한 번 볼까요?
 
페이드:(보자!)
 
당신이 제일 처음 봤던 것과 같이 방호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별도, 국적도, 그 무엇도 알 수 없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시체를 뒤져서 뭘 찾고자 하나요?
 
페이드:(총이라든가, 칼이라든가, 날카로운 것?)
 
 ✷ 행운 혹은 관찰 판정 ✷ 
 
페이드:
관찰력
기준치: 40/20/8
굴림: 2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나마 높은 직책으로 보이는 이를 찾아냅니다.
 
그의 품을 뒤지면 자그마한 주머니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림 전체를 훼손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부분 정도면 찢어둘 수 있을 것 같네요.
 
페이드:(일단 최대한 찢어 두고 바닥에 비친 형상 본다.)
 
그림 부분부분이 찢겼습니다.
 
바닥에 비추어진 스테인드글라스의 형상은 세 쌍의 연인을 황홀하고 또 기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연인은 키스를 나누고 있고, 두번째 연인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연인은……
 
아니, 저게 연인은 맞을까요? 단순히 사람 둘을 짝지어 놓은 게 아니라?
 
세번째 연인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형상이 색유리에 잘게 반사된 빛으로 바닥에 그려집니다.
 
지워지지 않는 자국 같습니다.
 
문득 알 수 없는 모독적인 기분이 듭니다.
 
 ✷ 이성 판정 ✷ 
 
페이드:
SAN Roll
기준치: 63/31/12
굴림: 75
판정결과: 실패
 
이성치 1 감소.
 
페이드:이런 걸 왜 만들어 놨지. …….
…………………………취향인가? (주머니칼 챙기고 문으로 나간다.)
 
정문을 활짝 열고 바깥으로 나서면, 회색빛의 하늘 아래 한창 이 내리고 있습니다.
 
……쉘터에 눈이라니. 인공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요?
 
햇살은 밝고 따사로운가? 날씨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시야에 보이는 건 아름답게 꾸며진 넓은 화원입니다. 분명 파라가 이쪽으로 향했죠.
 
대부분 키가 높은 나무와 덤불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어디가 이 화원의 끝이고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합니다.
 
날씨에 맞지 않게 만개한 꽃이 살랑거립니다.
 
페이드:5년이나 지났으면 슬슬 망할 때 됐지. (자조적이다. 화원 둘러본다.)
 
하지만 당신의 피부 위로 내려앉은 눈은 전혀 차갑지 않습니다.
 
이건 정말로 눈이 맞나요.
 
몇 걸음 떼지 않아도 화원은 순식간에 꽃과 나무로 가득해집니다.
 
코너마다 오래되고 기괴하게 보이는 조형물도 놓여 있고요.
 
왼쪽으로 꺾는 길이 있고, 오른쪽으로 꺾는 길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페이드:흠……. (근처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있을까?)
 
화원이니까 있을 겁니다. 하나 정도는?
 
페이드:(하나 주워서 땅에 세웠다가 넘어뜨린다. 2)
(오른쪽으로 간다!)
 
오른쪽으로 향하면,
 
꽃들 사이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놓여 있습니다.
 
아주 정밀하고 자세하게 세공되어 있지만, 그 형상이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고 기분 나쁩니다.
 
조형물이 내뻗은 촉수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습니다.
 
페이드:(멀찍이서 팔 뻗어 책만 빼온다.)
 
책만 슬쩍 집어 왔습니다.
 
읽을까요? 아니면 그냥 가지고 있을까요?
 
페이드:(읽는다.)
 
핸드아웃 공개.
 
모독적인 책을 읽은 대가로 이성 1D3 차감합니다.
 
페이드:3
 
이성치 3 감소.
 
길은 또다시 갈림길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이 있습니다.
 
페이드:(나뭇가지 또 줍는다. 1)
(왼쪽으로 간다.)
 
왼쪽으로 한참 걷다 보면, 아주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보입니다.
 
아니, 한 그루인가요?
 
두 그루가 서로 아주 가까이 붙어 자라, 마치 한 그루인 것처럼 보입니다.
 
 ✷ 관찰 판정 ✷ 
 
페이드:
관찰력
기준치: 40/20/8
굴림: 30
판정결과: 보통 성공
 
비슷한 키를 하고 있지만, 한 그루는 아주 비쩍 말라 드문드문 썩어들어간 부분까지 있습니다.
 
마치 다른 한 그루에게 영양분을 모두 뺏긴 듯한 형상입니다.
 
그래도 썩은 부분 중 일부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게 보입니다.
 
두 나무가 붙어 있기 때문일까요?
 
여전히 갈림길입니다. 마치 미로처럼요.
 
페이드:(오른쪽으로 간다.)
 
계속 걷다 보면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밭에 다다릅니다.
 
떨어진다고요?
 
눈이 내리는 와중에 꽃이 만개해 있는 것도 신기한데, 거기까지는 과학 기술로 설명할 수 있다고 쳐도.
 
만개한 꽃 가운데 여러 송이가 불특정하게 툭툭 그 꽃송이를 바닥으로 떨굽니다.
 
마치 인간의 머리를 떨어트리듯이요.
 
멀쩡한 꽃송이들이 삽시간에 떨어져 이룬 꽃잎 더미는 어딘가 징그러우면서도 동시에 아름답습니다.
 
페이드:전부 이상한 것들뿐이네……. (꽃 하나 주워서 본다.)
 
뚝뚝 떨어지던 것치고 꽃 자체는 평범합니다.
 
페이드:(어떤 색이지?)
 
붉은색과 흰색, 분홍색이 전부 뒤섞여 있습니다.
 
충분히 헤맨 것 같은데 파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들어간 건지.
 
그때, 누군가 당신의 어깨를 붙잡습니다.
 
남자:길을 잃으셨나요?
 
뒤를 돌아보면, 유들유들하게 웃는 남자 한 명이 언제부터인지 당신의 뒤에 서 있습니다.
 
사람 좋게 웃는 낯을 보자니 어째서인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기도……
 
그냥 재수없는 것 같기도……
 
남자:무어 씨가 잘 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최근에는 실패작밖에 안 나온다고 힘들어 하시던데.
몇 년 만에 눈을 뜬 기분은 어떤가요?
 
페이드:댁은 누구신데 나한테 이렇게 말을 걸지?
 
남자:전 그냥 조수입니다. 이곳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걸 좋아해서요.
그러는 당신은 스스로가 누구인지 아시겠나요?
 
페이드:내가 너한테 그걸 말할 이유가 있나?
말 왜 걸었어?
 
남자: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요. 도움을 드릴까 하고.
 
페이드:아니, 별로. 나 잘 가고 있는데.
 
남자: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이대로 가다가는 무어 씨는 영영 못 만날걸요.
 
페이드:그럼 더 좋고.
……어디로 가야 되는데?
 
남자:그 사람은 당신이 오기 직전에 저택으로 돌아갔어요. 딱 엇갈렸네요.
이렇게 마주친 김에 궁금했던 거라도 없나요? 멀쩡한 생존자는 처음 보잖아요.
 
페이드:음…….
내리는 눈, 가짜야?
 
남자:네. 따지고 보면.
 
페이드:따지고 보면?
 
남자:엄밀히 따지면 이 쉘터의 천장과 하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오래 썼으니 부서질 때도 됐죠.
쉘터 말고 이 세계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페이드:아…….
언제부터 부서지기 시작했는데?
 
남자:오 년 정도. 당신이 죽은 뒤부터겠네요.
 
페이드:난 어쩌다 죽었지?
 
남자:그것까지는 제가 모르겠네요. 내가 거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당신이 죽은 이후라.
 
페이드:아, 걔가 말 안 했어?
 
남자:무어 씨한테는 당신 이야기 꺼내면 매섭게 화를 내요. 아무도 물어 볼 엄두 못 냈을걸요.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쩌다 죽었는지, 무슨 사이였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페이드:설명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고.
걔 머리는 언제 잘랐대.
 
남자:글쎄요. 얼마 안 됐을걸요. 관리하기도 귀찮다고 그냥 자기가 썩둑.
당신의 복제를 만드는 것 이외에 그 사람이 신경 쓰는 건 없었으니까요.
 
페이드:네가 보기에도 미친 것 같지?
 
남자:하하. (대답 없이 웃는다.)
모르죠. 그게 당신에게 숨을 주기 위해서인지, 당신의 숨을 빼앗기 위해서인지.
 
페이드:아, 그래.
그 '숨을 맞추는 것'이 대체 뭐야?
 
남자:무어 씨의 방에서 읽지 않았나요? 종말 이후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페이드:내가 그거 읽은 건 어떻게 알고?
 
남자:여기까지 왔는데 그 사람 방에 안 들렀을 리가 없으니까?
아무튼, 그 사람이 정말 간절해 보이기에 내가 작은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더 색다른 볼거리는 없을 것 같으니 저도 슬슬 떠나려고요.
 
페이드:아,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가 보기에 난 실패작이야?
 
남자:자신이 실패작 같나요?
글쎄, 지금까지 나왔던 실패작들은 전부 무어 씨 손에 처분되었다는 것만 알려주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쪽이에요. 가면 세 번째 액자를 다시 살펴봐요.
 
페이드:흠……. (알려 준 길 따라간다.)
안녕.
 
남자:무운을 빌어요.
 
남자는 끝까지 수상쩍은 미소를 유지합니다.
 
그가 알려 준 길을 따라서 걸으면, 다시 화원의 입구로 돌아 왔습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당신이 나왔던 홀이 다시 나타나겠죠.
 
페이드:(문 열고 들어간다.)
 
저택의 홀로 들어서면,
 
 ✷ 관찰 판정 ✷ 
 
페이드:
관찰력
기준치: 40/20/8
굴림: 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잠깐. 뭔가 달라졌습니다.
 
홀의 복도에 걸려 있던 세 번째 그림이 바뀌었습니다.
 
분명 당신이 찢을 수 있을 데까지 찢어 놨는데,
 
화폭 안에 담긴 당신의 얼굴이 하나 더 들어 열둘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무표정한 가운데, 미소를 짓고 있는 당신이 하나 있습니다.
 
하얗게 번지는 입김까지 그려낸 것이 꼭, 그림이라기보다는 창문 같을 정도입니다.
 
당신의 얼굴을, 입꼬리가 그려내는 곡선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거대한 그림이 바닥에서 떨어져 당신을 향해 엎어집니다.
 
 ✷ 민첩 판정 ✷ 
 
페이드:
민첩
기준치: 80/40/16
굴림: 3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페이드를 향해 덮치듯 떨어져 내리던 큰 그림이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갑니다.
 
간신히 피했습니다.
 
……엎어진 쪽으로, 핏물이 질질 흘러나와 붉은 융단에 배어듭니다.
 
기괴한 현상에,
 
 ✷ 이성 판정 ✷ 
 
페이드:
SAN Roll
기준치: 59/29/11
굴림: 54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치 감소 없음.
 
이게 무슨 일이죠.
 
고개를 들어 세 번째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를 바라보면, 그곳에는 검은 문이 보입니다.
 
그동안 봐왔던 검은 문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화원에서 마주친 남자가 알려 주려던 통로는 이곳이었을 겁니다.
 
페이드:(그림 찢어도 되나?)
 
원한다면요.
 
페이드:(주머니칼로 마구 찢고 문으로 들어간다.)
 
그림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됩니다.
 
.
 
.
 
.
 
작고 좁은 문을 열면, 길고 어두컴컴한 계단이 위로 쭉 이어집니다.
 
잡을 수 있는 철제 난간이 있습니다.
 
볼에 닿는 서늘한 공기는 축축하고, 손에 잡히는 난간은 소름끼치도록 차가워서,
 
당신이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끼게 합니다.
 
모든 감각이 돌아왔습니다.
 
이때까지 쭉 괜찮았던 목덜미에도 시큰거리는 통증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위로 한참을 올라가면, 다시 큰 검은색 문이 보입니다.
 
들어갈까요.
 
페이드:(목 잠깐 스트레칭하고 한숨. 문 연다.)
 
방은 정갈하고 고요하며, 어둡습니다.
 
CD 플레이 기기가 있고, 앉을 수 있는 의자가 흰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페이드:(가져온 '인터뷰' CD 넣는다.)
 
CD를 넣자, 스크린에 서서히 흐린 빛이 쏘아지며 영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곳에 불러 모았다는 저명한 지식인들의 인터뷰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이 실험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딸을, 배우자를, 친구나 형제자매를.
 
그중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파라가 화면에 등장합니다.
 
당신은 이제 파라가 저들을 불러 모아 실험을 시작한 장본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입을 엽니다.
 
파라 무어:……저는 이 세계가 멸망하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누구처럼 비관론자도 아니고 사이비는 더더욱 아닌데도.
사실 멸망보다는 물리 법칙이 새롭게 구현되리라는 말이 더 맞겠군요.
(뜸을 들인다.) 종말 이후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두 명분의 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숨을 옮기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아무나와 숨을 맞출 수는 없고, 강렬한 감정을 가진 타인하고만……
어쨌거나, 뭐, 증오나 분노도 강렬하긴 하죠. 가끔은 사랑보다.
그래서인가.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보고 싶다던 그 사람들도 나 같은 짓을 벌이진 않더라고요.
 
파라 무어:난 걔를 사랑한 적도, 걔가 죽기를 바란 적도 없는데. 아니, 어느 순간에는 죽었으면 좋겠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
그래. 그거 하나라도 내 뜻대로 하려고……
 
파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 쪽으로 다가옵니다.
 
곧 화면이 흔들리더니 영상이 꺼집니다.
 
페이드:(CD 꺼내 반으로 쪼개고 '리허설' 넣는다.)
네 뜻대로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영상은 이어지는 듯합니다.
 
스크린 속 파라는 아직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높게 반묶음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모습과 가깝네요.
 
그의 표정에서는 깊은 회한과 착잡함이 묻어나오고, 자세히 보면 카메라에 언뜻 보이는 옷깃 위로 피가 잔뜩 튀었습니다.
 
파라 무어:기록 시작하겠습니다. 312번째 더미. 드디어 비슷한 개체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난 제정신이라는 말도 설득력 없겠죠. 징그러운 새끼. 지긋지긋한 새끼……
……말을 걸었을 때 대답하고도 무너지지 않는다면 성공으로 간주합니다.
 
카메라가 약간 내려갑니다. 수술대에 놓인 당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니, 저것이 정말 당신일까요?
 
파라가 당신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그 목에 손을 얹은 채 말합니다.
 
파라 무어:내가 누군지 알겠어?
 
아주 고요한 정적 속, 몰아쉬는 파라의 숨소리만 잡히는 가운데.
 
눈을 뜬 스크린 속 당신은,
 
옅은 숨을 뱉으며,
 
선명하게 속삭입니다.
 
“멍청이.”
 
그리고 당신은, 아니, 당신을 닮은 그것은 살점과 핏덩이로 녹아내리듯 부서져 내립니다.
 
파라의 손 끝에서 한 줌 핏물이 흘러내립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가 무엇을 이루려고 했든 완전히 실패입니다.
 
잠시 화면이 멈춥니다. 눈가가 새빨갛게 짓무른 파라가 다음 영상에 나옵니다.
 
머리칼이 짧아진 파라가 다음 영상에 나옵니다.
 
차가운 표정을 지은 파라가 다음 영상에 나옵니다.
 
파라는 당신을 살려내겠다는 행위에 점차 몰두하고 집착합니다.
 
그러한 모습에, 경멸을 느끼나요, 혹은……
 
페이드:지금 징그럽게 지긋지긋한 새끼가 누군데……. (영상은 아직 한참 남았나?)
 
영상은 몇 번 더 반복하다가 멈춥니다.
 
특별할 것 없이 전부 비슷한 광경입니다.
 
CD를 이만 꺼낼까요?
 
페이드:(꺼내서 역시 두 동강 낸다.)
 
CD가 반으로 부서졌을 때,
 
파라 무어:왜 CD한테 화풀이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페이드:널 쪼갤 수는 없잖아.
 
파라 무어:쪼갤 수나 있고?
 
페이드:해 봐?
 
파라 무어:되겠냐. 네가 곰도 아닌데.
 
페이드:문짝은 찢었었는데.
 
파라 무어:내가 문짝이냐?
 
페이드:문짝보다야 덜 단단하겠지. (CD 잔해 바닥에 던진다.)
 
파라 무어:(담배 끄트머리 씹으면서 서 있다.)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마음 아프네. 나름 내 지난 5년의 총합인데.
 
페이드:별로 안 아파 보이는데?
 
파라 무어:눈물이라도 흘려 주랴?
 
페이드:아니, 싫어. 불은 왜 안 붙이고 있어?
 
파라 무어:실내 흡연 안 해.
 
페이드:살인은 하고?
 
파라 무어:아, 뭐, 그건……
글쎄. 어차피 멸망하면 다 죽을 거니까.
 
페이드:정신 나갔나?
 
파라 무어:내가?
 
페이드:응. (담배 빼앗는다.)
 
파라 무어:아. (빼앗긴 담배 바라보다가 품에서 담뱃갑 꺼내 하나 더 입에 문다.)
아니, 나 지금 최근 중에서 제일 제정신인데.
 
페이드:흠. …….
(담뱃갑 빼앗는다.)
 
파라 무어:아이씨…… (손 뒤로 뺀다.)
냅둬, 좀. 왜 이래?
 
페이드:그럼 하나만 줘 봐. 아니, 나, 좀 심란해서 씹어야 돼.
네가 물고 있던 건 싫고.
 
파라 무어:짜증 나게 하네…… 풀 씹든가.
 
페이드:염병……. 네 손가락 씹어 줄까?
 
파라 무어:미친 지랄 진짜……
 
파라는 스크린 쪽으로 다가가, 스크린을 휙 제칩니다.
 
그 너머에는 그 어느 때보다 검고 반듯한 문이 있습니다.
 
파라는 익숙한 듯 그 문 손잡이를 잡고 당신을 돌아봅니다.
 
그 얼굴에 문가를 타고 흐린 빛이 쏟아집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꼭 우는 것 같습니다.
 
파라 무어:따라와.
 
페이드:왜?
 
파라 무어:그럼 여기서 나랑 사이좋게 나란히 멸망 맞든가.
 
페이드:(따라간다.) 문들은 왜 다 검어?
 
파라 무어:불길해 보이고 좋잖아. (헛소리.)
 
문 너머로 향하면, 시야를 환하게 물들이는 조명들이 아름답습니다.
 
반원 형태의 유리돔이 하늘에서 눈처럼 쏟아지는 세계의 파편들로 얼룩덜룩하게 빛납니다.
 
이곳은 흡사 정원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종말을 맞기엔 너무나 안정적인 장소네요.
 
아직 여린 줄기에 매달린 꽃송이며 나무의 푸른 잎들이 건재합니다.
 
저택 안에서 진동하던 피비린내나 냉한 냄새가 단숨에 잊힐 정도로,
 
끝을 직감했기에 더욱 진한 생명의 향기가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파라 무어:(담배에 불 붙인다.)
 
페이드:한참 냄새 좋은데 초 치네.
 
파라 무어:어쩌라고.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 엄지 손가락으로 밀어서 페이드에게 내민다.)
 
페이드:(의아한 얼굴로 받는다.)
 
파라 무어:심란하다며.
 
페이드:확실히 멸망할 건 맞나 봐. 네가 내 말도 들어 주고……. (입에 문다.)
 
파라 무어:선행 좀 베풀려고. 다음 생에서는 제발 너 안 만나게.
 
페이드:걱정 마. 다음 생 같은 거 없어. (쪼그려 앉는다.)
나도 실패작이면 어쩔 거야?
 
파라 무어:이미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숱하게 실패했는데……
시체도 사라지고, 세상은 종말 직전에. 되는 게 하나도 없네.
 
페이드:그럼 다행이고.
여긴 다 네가 꾸몄어? 식물 왜 이렇게 많지.
 
파라 무어:연구원들 취향.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때 저런 연구실은 너무 삭막하다고. (그 옆에 쪼그린다.)
좀 나은 것 같아?
 
페이드:이런 건 싫다고 하는 게 네가 바라는 대답인가?
 
파라 무어:그렇다고 하면 좋다고 대답하려고?
 
페이드:되게 마음에 든다고 할 걸.
 
파라 무어:역시 난 네가 싫어.
 
페이드:새삼스럽게.
 
파라 무어:진짜 끔찍해. 지긋지긋하고.
 
페이드:살리지 말지 그랬어.
 
파라 무어:왜 너 같은 게 내 인생에 껴들어서.
 
페이드: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러면 네가 우리 만나서 참 다행이라 할까?
 
파라 무어:아니. (다 태운 담배 꽁초 대충 짓잇겨서 끈다.) 동감이야.
말 걸지 말지 그랬어.
 
페이드:누군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네 집념 알았으면 신경 끄고 살았을 걸.
 
파라 무어:무책임한 새끼.
우린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어. 너만 처신 똑바로 했으면.
 
페이드:지금 우린 뭔데?
야, 내 책임만은 아니지. …….
 
파라 무어:몰라. 모든 것. 아니면, ……
모조리 네 책임이야. 전부. 다.
 
페이드:아니면. 그래서 어쩔 거야. 해답이 날 살리는 거였어?
책임지라고?
 
파라 무어:그래. 적어도 넌 그따위로 사라지면 안 되지.
(몸 일으킨다.) 일어나. 가자.
 
페이드:나 어떻게 죽었는데?
 
파라 무어:몰라.
 
페이드:시체는 어떤 상태였어?
 
파라 무어:몰라.
 
페이드:넌 날 잊을 수 있다니까. (일어선다.)
 
파라 무어:안 되던데. (그리고 앞서 걷는다.)
 
페이드:다 모른다며? (따라간다.)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풍경에 자꾸만 시선이 갑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세계의 파편이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유리 돔에 부딪혀 떨어지지만, 눈앞으로, 머리 위로 지나는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입니다.
 
우리는 정원의 오솔길로 발을 옮깁니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화원에서 마주했던 기이한 조각상과 흡사한 대리석들이 즐비한 장소에 다다릅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들은 어떠한 의식처럼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파라는 그 원의 중앙으로 들어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세계가 종말을 맞이하는 가운데,
 
그가 조용히 속삭입니다.
 
파라 무어:데티아스.
 
그가 당신의 손을 끌어 자신의 목에 올립니다.
 
파라 무어:죽어 줄게.
 
손에 닿은 파라의 목은 뜨겁습니다. 손 아래 맥박이 조용하게 고동치고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천장 아래에서,
 
파라는 당신을 방해하기 위해 그 지난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오직 당신을 순순히 죽게 놔두지 않겠다는 비틀린 집착과 자존심으로 뭉쳐서.
 
당신을 애정하는지, 증오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파라 무어:도로 가져 가. 네 것이었던 흔적 전부.
 
당신의 손으로는 어렵지 않게 그 목덜미를 틀어쥘 수 있습니다.
 
파라 무어:네가 바라던 거잖아.
 
손아귀에 힘을 주면 끝입니다.
 
파라 무어:대신 딱 하나만 남기면 돼. 간단하지.
 
사사건건 당신을 방해하는 이 성가신 훼방꾼을 간단히 치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서, 그의 숨만큼과 함께 살아가다가,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모두에게 잊힐 때쯤,
 
당신이 염원하던 대로 사라지면 되는 일입니다.
 
페이드:파라.
5년은 길었어?
 
파라 무어:그래.
지독하게.
 
페이드:그 끝에 만난 게 실패작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막 줘도 돼?
 
파라 무어:상관없어. 네가 진짜든, 실패작이든, 성공작이든……
살아가게 하면 그만이니까.
 
페이드:살까. 살면 되나? (손에 작게 힘 준다.)
그게 네가 바라는 거야?
 
파라 무어:(대답하지 않고 그저 직시한다.)
 
페이드:야, 너무 혹하는 제안이라 그래.
나한테 흔적 남는 건 상관 없으니까.
……아, 없었는데………….
좀, 거북해서…………. (손 떼어낸다.)
 
파라 무어:(멀어지려는 손 붙잡는다.) 졸라. 더한 것도 했잖아, 너.
없애고 다 지워. 내가 죽으면 그만이잖아. 그렇게 살다가 네 맘대로 뒈지든, 날 비웃든!
…… ……내 숨은 네게 남겠지.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니냐?
 
페이드:차라리 죽이지 말라 애원하지 그랬어.
그럼 내가 고민할 일도 없었잖아.
 
파라 무어:그럼 죽여 줬을까?
 
페이드:그랬을 걸. 아마도. ……아마도.
처음엔 네가 내 숨을 가져갈 생각이었나?
 
파라 무어:글쎄. 그것도 모르겠어.
딱히 널 죽여서 내가 살 정도로 삶이 간절하지는 않아서.
 
페이드:매번 목을 조르던데.
 
파라 무어:그건 실패작들이었으니까. 처분한 거야, 그냥.
 
페이드:처분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나?
 
파라 무어:그럼 뭐, 고상하게 총으로 쏴 줘?
어차피 너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 써?
 
페이드:궁금해서.
날 수없이 죽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어?
 
파라 무어:……
(손 도로 제 목에 가져다 댄다.) 네가 직접 겪어 봐.
무슨 생각 드는지.
 
페이드:(고개 기울인다.) 아무 생각도 안 들 것 같은데.
 
파라 무어:그럼 왜 안 죽이고 있어?
 
페이드:내 손에 처음으로 죽는 게 너인 게 싫어.
네 목에 흔적 남을 것도 싫고,
너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도, 멸망 뒤에 살아가는 것도 싫은데.
야, 난 네 숨 받으면 곧장 죽을 거야.
그래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겠어?
 
파라 무어:나 없는 삶을 누릴 수 있는데 그건 싫어? (명백한 비웃음으로 입꼬리 올린다.)
 
페이드:너는 없어도 있을 테니까.
남은 평생을 함께한다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잖아.
 
파라 무어:그렇다고 내 손에 죽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 거냐?
 
페이드:죽일 수 있어?
 
파라 무어:…… ……
어렵지 않지. 많이 해봤는데.
 
페이드:아깐 못 쏘던데.
 
파라 무어:개고생한 거 수포로 돌리기 싫었으니까.
 
페이드:실패작인 줄 알았다며?
 
파라 무어:시간이 별로 없었고, ……
실패작이어도 살리기로 결심했었어서.
하지만 지금은, 그래, 네가 날 죽이기 그렇게 싫다면야.
 
페이드:아. 글쎄.
꼭 목 졸라 죽여야만 하는 건 아니지?
 
파라 무어:그럼?
 
페이드:(주머니에서 이전에 입수한 칼 꺼낸다.)
누가 흘리고 갔던데.
 
파라 무어:그 쬐깐한 걸로 뭘 하겠다고.
 
페이드:몇 번이든 찌르면 죽지 않을까?
이쯤……. (경동맥 짚는다.)
 
파라 무어:……그게 더 흔적 남을 거란 생각은 안 해?
그냥 네 손으로 해. 그게 내 조건이야.
싫으면 네가 죽든가…… (억지 부리기 시작한다.)
 
페이드:세상이 널 죽이게 둘 순 없나.
 
파라 무어:그랬다간 너도 같이 죽어.
 
페이드:그냥 죽자.
지긋지긋해.
둘 다 살거나, 둘 다 죽거나가 좋겠어.
난 대상 없이 답을 찾아 헤매고 싶진 않아…….
 
파라 무어:무슨 답?
 
페이드:네가 얼마나 지나야 날 잊을까.
5년은 너무 짧았지, 파라.
 
파라 무어:지금 알려 줄게.
불가능해. 평생이 가도.
5년이 아니라 10년, 50년이 지나도. 억겁이 지나고 세상이 무너졌다가 재창조돼도.
넌 나한테 있어.
 
페이드:아니, 내가 죽으면 넌 잊어갈 거야. 네 손에 감겼던 감촉은, 들리던 목소리는, 보이던 것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난 네게 없어.
잠깐 머물었던 적이야 있어도, 그게 네가 날 붙잡았단 얘긴 못 되지.
(파라 총 빼앗는다.)
 
파라 무어:대신 난 네 이름을 알고, 네가 저지른 일을 알지.
이건 머무름이 아니라,
(얼굴 찡그린다.)
…… ……박제야. 데티아스 노시그네트.
 
 ✷ 민첩 판정 ✷ 
 
페이드:
민첩
기준치: 80/40/16
굴림: 97
판정결과: 실패
 
파라 무어: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85
판정결과: 실패
 
파라의 손에서 총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굽니다.
 
집으려면,
 
 ✷ 민첩 판정 ✷ 
 
페이드:
민첩
기준치: 80/40/16
굴림: 3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파라 무어: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총은 페이드의 손으로 들어갑니다.
 
페이드:(안전장치 풀고 제 관자놀이에 댄다.) 시간이 지나고 뇌기능이 저하되면 전부 잊을 거야.
그게 인간의 한계야, 파라.
 
파라 무어:페이드! (이 악물고 소리 지른다.)
난 아직 널 잊지 않았어. 네가 바라던 끝이 이런 건 아니잖아!
 
페이드:그렇다고 그냥 널 죽이라고?
그럼 네 시간은 멈추는데.
날 기억하는 그대로.
 
파라 무어:그래서 내가 언젠가 너를 잊을 가능성에라도 걸겠다?
너 그럼 평생 정답 모르는 거야, 멍청아……
 
페이드:그건 내가 뭘 어떻게 하든 똑같아.
그러니 미래에라도 걸어 봐야지.
 
파라 무어:…… …… (한참 말 없이 어깨만 들썩인다.)
그렇게 나한테 잊지 못할 트라우마 심어주면 내가 퍽이나, ……
죽지 마. 페이드.
죽지 말라고, 제발, 사라지지 마……
 
페이드:지금껏 내 죽음 숱하게 봐왔으면서.
네가 생각하는 최선은 네가 죽는 거야?
 
파라 무어:그래.
나는 죽어서 널 잃고, 너는 나를 가지고.
그게 제일 공평한 손해야.
 
페이드:공평 좋아하네. 그럼 최악은?
 
파라 무어:……
네가 죽는 거……
 
페이드:전적으로 네 손해라?
 
파라 무어:보고 싶지 않으니까. (눈 감는다.)
 
페이드:5년 새 인간성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파라 무어:그랬으면 너 살린다고 그 지랄 떨었겠냐.
죽든 말든 놔두고 내 살 길이나 찾았겠지.
 
페이드:숨을 나눠야 한다며?
그 대상이 나라서 살리려 했던 거 아니었어?
 
파라 무어:(대답 못 한다.)
…… ……그래서 뭐.
결국 자살하고 내가 널 잊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만 가지겠다고?
그게 네 최선이야?
 
페이드:그럼 어쩔까. 여기 드러누워서 종말이나 기다릴까?
 
파라 무어:네가 날 안 죽이겠다면.
그래, 나 혼자 남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겠다.
어쩔래? 같이 죽어?
 
페이드:그거나 이거나 무슨 차이가 있는진 모르겠는데. 나로서는.
얘기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보기 싫으면 눈 감아.
넌 실패했어.
멍청이. (방아쇠 당긴다.)
 
방아쇠를 당긴 순간,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당신은 저 정도로 일그러진 표정을 본 적 있나요?
 
세계가 무너집니다.
 
당신의 숨과 삶도 세계와 함께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보다 더 당신의 삶을 바랐으나, 5년의 세월에 걸쳐 차근차근 초라해진 그 여자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집니다.
 
죽음이 다다랐기 때문인지, 종말이 당신을 집어삼켰기 때문인지.
 
주저앉은 당신에게 달려 온 파라가 맞댄 손이 불타오르듯 뜨겁습니다.
 
그 어떤 애절함과 증오와 애정이 담기더라도.
 
이것은 너절한 폭력이며 숨의 갈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불온한 숨결을 받고서, 파라는 과연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요.
 
그는 이제 당신의 숨으로 호흡하고 또한 죽어갈 텐데요.
 
당신은 그의 생명을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신을 온전히 잃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누구의 패배입니까?
 
우리는 또 다시 서로의 삶을 할퀴어 상흔을 내고,
 
딱 그 흔적만큼의 파편을 남깁니다.
 
그 자그마한 흉터로부터 차츰 숨이 멎으면,
 
마침내 두 사람분의 멸망입니다.
 
혼자서는 호흡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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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C 생환 PC 로스트
 
ENDING 2 네 손 안에서 멎는 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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