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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주를 사랑하는 만큼너라는 별을 사랑해.우리는 멸종의 시대에 남은 최후의 존재야.
환한 빛이 망막을 투과하자 익숙한 대피소 내부가 보입니다.
곧 차가운 기온이 리젠타인의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조금 전까지 자리에 있었던 윤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리젠타인과 윤이 만들어낸 조약하지만 가득 찬 공간이 보입니다.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눈꺼풀이 무겁습니다.
겨울잠을 자기에는 봄이 찾아오지 않을 시대죠.
리젠타인이 누워 있는 대피소 한쪽 벽은 지진과 해일. 충격을 버티기 위한 고강도 특수 강화 유리로 제작되었습니다.
투명한 유리 안에서 보이는 밖은 전부 새하얀 눈에 파묻혀 있습니다.
지구 전체가 얼음 같은 추위에 잡아먹히고 있는 상태입니다.
탁자에서 떨어져 있는 책들. 커피 자국이 남아 있는 컵. 일정한 속도에 맞춰 깜박이는 전등….
그 전에 추위에 적응이라도 할 겸 방을 치워두는 게 낫겠습니다.
리젠타인과 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이 대피소를 집으로 삼아 살아가게 될 테니까요.
리젠타인:(가만히 서서 유리창 밖 둘러봅니다.)
창에 손을 대자 손톱 끝부터 한기가 느껴집니다.
지구를 덮은 이 눈이 바다이고, 산이고, 곧 하늘인 것처럼 눈은 지평선도 되고 수평선도 되는 것 같습니다.
어디가 바다인지 또 어디까지가 땅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나무는 메마르고 가난한 채로 무거운 눈을 버티고 있습니다.
멸종의 시대가 다가오기 전 상상해 봤던 인류의 멸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구에 살고 있던 모든 생명체들은 추위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리젠타인: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89 |
판정결과: |
실패 |
생명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겨울은 영원합니다.
리젠타인이 살았던 과거의 지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이곳.
모두가 죽거나 도망쳤고, 윤와 리젠타인의 최후 역시 같을 것입니다.
탁자와 함께 마련된 의자에는 윤와 리젠타인의 옷들이 아무렇게나 걸려 있습니다.
리젠타인이 윤의 옷을 정리해 주려고 하면, 겉옷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이 하나 잡힙니다.
리젠타인:...? (조심스럽게 슬쩍해 봅니다...)
초소형으로 제작된 이 기계는 지구 주변을 이루고 있는 우주 상공 주파수를 미세하게 감지합니다.
또, 그들이 보낸 신호를 지구의 언어로 변형해 출력할 수 있습니다.
탁자 위에는 오래된 신문들과 물 컵, 책 몇 권이 어지럽게 놓여 있습니다.
인쇄된 글자 대부분이 지워졌고,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 단어들 몇 개가 전부입니다.
남아 있는 단어들은 어떠한 집합도 가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리젠타인:
지능
기준치: |
70/35/14 |
굴림: |
4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하지만 이 신문은 어딘가 이상해보입니다.
리젠타인이 대피소 안에서 봐왔던 글을 가진 종이들은, 오래되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많은 문장이 지워져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글을 지워버리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책의 제목은 제각각입니다.
인류가 멸망을 선언하기 전 쏟아져 나온 수십 권의 생존과 우주.
그리고 새로운 행성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책들을 윤은 지구에 남은 이후 참 많이도 읽었습니다.
어쩌면 남겨진 책들이 이것밖에 없어서일지도 모릅니다.
방 안에 마련되어 있는 냉장고는 실상 쓸모 없는 제품입니다.
윤과 리젠타인이 먹고 마시는 음식들은 온도에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윤은 방 안에 냉장고를 가져다 두었습니다.
냉장고 안에는 물 두 병과 단단하게 밀폐 포장된 음식이 들어 있습니다.
멸망한 지구에서 술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조금 웃기네요.
깔끔하게 정리된 냉장고는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더 많습니다.
방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을 때, 리젠타인의 뒤에서 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옷에 묻은 눈을 털며 현관에 서 있는 윤의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습니다.
협소한 현관에 윤과 리젠타인의 신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윤:대피소 전망대에 다녀왔어. 절반 넘게 눈에 파묻혔어도 망가진 곳은 없더라고. 다행이지.
리젠타인:깨워서 같이 가지 그랬어. (다행이군...)
윤:굳이 자는 거 깨워서 데려갈 필요는 없으니까. 어차피 확인만 할 거였고...
대피소 전망대는 대피소와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체입니다.
생존 인류를 태운 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고 도착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우주로 날아간 날이.
전망대는 우주선에 타지 못한 잔류된 인구가 우주로 향하는 우주선을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우주선에 탄 채 새로운 지구,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나선 인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윤과 리젠타인을 제외하고 지구에 남게된 인류들은 모두 멸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윤과 리젠타인은 얼어붙은 행성에 남은 지구 최후의 인류입니다.
윤:동면 기기를 확인하러 갈 건데, 같이 갈까?
절대 녹지 않을 지상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리젠타인에게 윤이 묻습니다.
리젠타인:...응. 같이 가자. (주섬주섬... 옷 챙기고...)
동면실로 향하며 윤은 대피소 안에서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우주선에는 타지 못했지만 최후까지 지구에 남았던 사람들이 세운 이 대피소는 약 2천여 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택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지만 남은 인구 중 소수는 동면을 선택했습니다.
…혹은 지구를 떠났던 생존 인구가 다시 이 행성에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전부 데려갈 그날을 위해 잠든 사람들.
대피소 지하에 누워 있지만 마치 관 속에 들어간 것과 다름 없는 모습이라는 사실까지 윤은 모두 이야기합니다.
윤:…그렇게 되면 깨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하겠다고 했어.
리젠타인:같이 잠들지 않고? 막연히 기다리기만 해야 될 텐데.
윤:떠난 우주선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그리 막연한 건 아니지.
내 두 눈으로 보고 싶기도 했고. 고향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돌아오는 걸...
윤의 저런 미소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윤과 리젠타인을 남겨두고 지구를 떠난 사람들이 윤과 리젠타인을, 혹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남아 있는 인류를 데리러 올 거라는 사실을요.
그 기다림은 분명 외로웠을 테지만, 윤의 옆에는 리젠타인이 있습니다.
― 36%… 57%… 88%… 관리자 확인 증명되었습니다.
윤이 가지고 있던 관리자 인식증을 문에 갖다 대자 생경한 기계음이 들립니다.
윤을 제외하고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 본 것이 너무 오랜만입니다.
리젠타인은 윤을 따라 동면실 안으로 들어섭니다.
고작 한 사람이 누울 정도로 좁은 동면 캡슐 6대가 누워있습니다.
두꺼운 겉옷을 리젠타인에게 입혀주며 윤이 말합니다.
윤:조금 추울 건데, 못 견딜 것 같으면 말해. 방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리젠타인의 어깨를 잠깐 끌어 안았다가 놓아주는 윤이 뱉는 단어는 오늘따라 유합니다.
곧 윤은 동면 기기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작동에 이상은 없는지. 기기 안에서 잠든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어떠한지…….
리젠타인: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3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지능
기준치: |
70/35/14 |
굴림: |
2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동면실 안은 대피소 내부와 비슷하게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합판 재질로 만든 벽과 옅은 베이지색 블럭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다 알 것 같은 친숙함이 느껴집니다.
[동면 캡슐 | 자료 보관함 | 프로젝트 화면 | 철제 문]
성인 1명이 누우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모두 채워질 것 같은 크기를 가진 캡슐은 매우 협소해 보입니다.
조금만 몸을 뒤척이면 캡슐 뚜껑에 이마를 부딪힐 것 같은 높이지만,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캡슐 뚜껑으로 동면하는 인간의 얼굴이 보입니다.
슬쩍 바라본 동면 인간은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들은 지구에 버려진 인간입니다.
죽음을 택하기보다 불확실한 미래와 영원의 잠을 선택한 인간.
리젠타인이 들여다 본 동면 캡슐 속 인간의 이름은 '제니(Jennie)' 입니다. 제니 ….
캡슐 속 인간을 바라보고 있으면 윤이 리젠타인 옆으로 다가 와 어깨를 잡아 당깁니다.
리젠타인:응, 그냥... 잠들어 있는 것 같아. (눈 돌린다.)
윤:……나는 우리가 동면을 선택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이라고 믿어.
그렇게 말하는 윤과 함께 우리는 동면 캡슐 앞에 조금 더 서 있었습니다.
리젠타인:그래도, 난 혼자만 깨어있다고 생각하니까...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윤 보고...) 너가 있어서 다행이야.
(철제 문 봅니다.)
윤: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가 있어 다행이라고.
동면실 한쪽 벽에 마련 된 이 문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문은 관리자 인식증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한 문인 것 같습니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대피소의 관리자는…… 윤이죠.
동면 기기 관리를 전부 끝낸 윤이 리젠타인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대피소에서 사용했던 내부 통제실인데,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문에서 떨어져 자료 보관함 살펴봅니다.)
보관함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자료들은 이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역사입니다.
과학과 우주에 관련된 연구자료부터 출간된 책까지.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펼치자 생명의 자손 이라는 투박한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인간이 별의 죽음으로부터 탄생된 존재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억 년동안 반복된 별들의 죽음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시행된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소수의 학자들은 인간이 태초의 우주 그 자체에서부터 존재한 미약한 생명체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
과학 기능치가 없다면 교육으로 대체 가능합니다.
리젠타인:
교육
기준치: |
50/25/10 |
굴림: |
98 |
판정결과: |
실패 |
(...)
리젠타인:
교육
기준치: |
50/25/10 |
굴림: |
73 |
판정결과: |
실패 |
(빠른 포기.)
동면 기기에 대한 사용법이 적힌 안내서도 있습니다.
안내서 앞에 표시되어 있는 동면 기기는 리젠타인이 동면실에서 본 것과 같아 보입니다.
― 인간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
…라는 글로 시작되는 설명서. 기기를 다루는 방법과 긴급 상황시 대처 방법등이 적혀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온도에 얼어붙은 채 잠들어 있는 인간은 이렇습니다. 동면 기기는 지구에 남은 인류를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더 이상 추위와 병, 배고픔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동면 기기의 사용을 원했고 그들은 이 멸망한 행성을 떠나거나, 다시 살아갈 그날을 위해 죽음 대신 잠을 선택했죠.
동면 기기의 최적 작동 유효 기간은 약 400년.
윤이 더 이상 동면 기기를 관리하지 못한다면 잠든 인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리젠타인:한 명한테 목숨을 내맡기다니, 꽤나 무모하네. (...) 하긴... 그러니까 잠들기를 택한 거겠지. (프로젝트 화면 봅니다.)
얼어 붙은 지구는 유일한 파란색을 잃고 눈으로 덮여있습니다.
지구 내 생명활동 감지를 나타내는 불빛은 모두 꺼져 있습니다.
둥근 리모컨을 반대로 돌리자 대피소 내에 존재하는 두 개의 초록빛이 사라지고 지구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참담할 만큼 차가운 온도와 얼어붙은 땅과 바다만 존재할 뿐입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동면 기기.
동면을 선택하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문이 닫히기 전 시야에 들어온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면실이
동면실에서 나온 윤과 리젠타인은 함께 대피소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강하지 않아서 대피소 밖을 잠시 걸어도 좋은 날이라네요.
여전히 대피소 밖은 강한 추위가 느껴지지만 시야를 가리는 눈 때문에 앞으로 걸어가지 못하지도, 세찬 바람 때문에 피부가 얼어 붙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발은 푹푹 빠지고 중심도 제대로 잡을 수 없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갈 때마다 다리와 허리에 잔뜩 힘을 준 채 걸어야 합니다.
리젠타인:
운
기준치: |
60/30/12 |
굴림: |
70 |
판정결과: |
실패 |
말라붙은 나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가 뚝 부러졌습니다.
지지대를 잃은 눈이 하필 그 아래를 지나가는 리젠타인 위로 우수수 떨어집니다.
언젠가 봤던 해변의 모래처럼 부드럽게 부서지는 눈이었지만 덕분에 머리부터 어깨까지 전부 눈으로 덮였습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던 윤은 얄미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리젠타인:(맥없이 눈 맞다가... 조금 덜어서 윤 머리에 얹는다.)
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이 잔뜩 붙은 리젠타인의 머리카락과 어깨를 털어주면서도 실실댑니다.
눈이 옷 안으로 파고들자 차가운 감각이 느껴집니다.
리젠타인:안 추워? (옷 꼭... 여미고...)
윤:나는 누구처럼 눈을 정통으로 맞지는 않아서 괜찮네.
리젠타인:왜 하필 내 머리 위에서 나뭇가지가... (나무 째려본다.)
윤:나무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웃김...)
윤은 리젠타인의 손을 잡고 걷기 힘든 눈 위를 헤쳐 걸어갑니다.
대피소에서 전망대까지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건 눈이 쌓이기 전의 일입니다.
앞으로 한 걸음 걸어 가기도 힘든 지금. 점점 숨이 차오릅니다.
리젠타인:아예 날아갈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실없는 농담이나 하고...) 자, 업어. (당당)
윤:날 수 있다면 확실히 편하긴 하겠네. 인간은 왜 날개가 없는 거지? (궁시렁대듯...) 오냐. (안정적으로 업는다.)
리젠타인:(따뜻하다...) 자. 출발! (신났다.)
이 길도 진작 얼음에 덮였어야 할 곳이지만, 윤이 꾸준히 길목을 관리한 덕분에 그나마 아직도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곳으로 남았습니다.
잎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른 나무는 얼어붙은 채로 빼곡하게 세워져 있고, 그 가운데를 지나갈 때마다 꼭 산에서 조난이라도 당한 기분입니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 사계절 모두 눈에 파묻혀 있는 도시가 있었으니까요.
윤과 리젠타인이 우주선을 타지 못한 건 운이 없어서였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대피소에 도착했고, 최후까지 지구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대피소 창문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한 크기입니다.
이 정도 크기도 높게만 느껴지는데, 전망대의 절반은 눈 속에 파묻힌 상태니 과거에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높이였는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낡고 허물어진 전망대 안에는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리젠타인:
지능
기준치: |
70/35/14 |
굴림: |
4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우주선이 지구를 떠나는 장면을 본 게 어디 우리뿐이던가요?
3년 전 전망대에 존재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떠나는 우주선을 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기권 밖으로 사라지는 우주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기억 속에 흐릿하게 자리한 그 모습 그대로일겁니다.
윤:우주 상공으로 출발하기 전, 우주선을 탄 사람들이 우리한테 말했잖아.
예전만큼 환하지는 않은 빛이지만, 여전히 전망대 위를 비추고 있는 태양 때문입니다.
시야가 익숙해지자 두 번째로 눈에 들어 온 것은, 누구도 밟지 않은 깨끗하고 깊은 눈.
우주선 발사지와 도착지를 가린 채 언덕처럼 쌓인 눈길.
무너진 건물과 서서히 파묻혀 가는 문명입니다.
전망대 끝에 올라도 우주선이 발사되었던 발사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전망대 꼭대기에 훤히 내다보였던 그곳은 지구에 최후로 남은 우주선 발사지이자, 도착지였습니다.
정말 인류가 남은 우리를 위해 지구로 되돌아온다면 바로 그곳일 겁니다.
대피소가 이곳에 있고, 얼어붙은 채 잠든 인류가 바로 여기 있으며, 윤과 리젠타인이… 최후로 여기에 남아 있으니까요.
둘은 전망대 꼭대기에 있는 두 의자에 나란히 앉습니다.
리젠타인:넌 아직 그 말을 온전히 믿는 것 같네. (조금은 초조해 할 법도 한데...) 약속했으니까, 분명 오겠지?
윤:사람은 자신의 고향을 잊지 못하는 법이니까. 3년이면 초조해 할 시간은 지났고. 이 생활에도 슬슬 적응이 된 것 같아서... (저 먼 지평선이나 바라본다. 눈 부신지 잠시 찌푸렸다.)
리젠타인:...그런가. 그 사람들이 결국 좋은 곳에 도착했다면... 우리 정도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생각할지도. (부정적이다...) 뭐, 이곳에서 그냥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같은 곳에 시선 두다 손으로 눈 가린다.)
윤:반드시 오기로 약속했으니, 한 명 정도는 우릴 데리러 오지 않을까. 올 거야. 반드시. 그 사람들을 못 믿겠으면 나를 믿어. (어쩐지 확신에 가득 찼다. 그러니 관리자를 자처한 것이겠지만.) 여긴 너무 추우니까... ...죽을 거면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죽지. (눈 감고서 네 어깨에 머리 톡 기댄다.)
리젠타인:(끄덕...) 그 사람들은 못 믿어도... 너는 믿으니까.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가만히 풍경 바라보다 제 어깨에 기댄 윤 돌아본다.) 글쎄, 어디서나 나한테 제일 따뜻한 곳은 여기인걸. (꼼지락...) 만약 여길 떠나게 되면 넌 하고 싶은 게 있어?
윤:(침음.) 글쎄다. 너랑 같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 (바람 빠지는 웃음.) 근 3년간은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뭐... 그 사람들이 새로운 행성을 찾았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도 새로운 행성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거든.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주를 떠돌고 있을 수도... (...) 하지만 인류는 언젠가 또다른 행성을 찾겠지. 지금이 아니더라도, 조금 먼 미래에 반드시. (기댄 채로 작게 웃는다.)
리젠타인:(작게 웃고...) 그럼 우린, 그 사람들이 우리를 데리러 오기 전까진 아무것도 알 수가 없네. (잠시 침묵한다.) 뭐, 떠난 사람들도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이곳에 영영 남아 따뜻한 행성으로 가지 못해도 딱히 슬프진 않을 것 같아. 둘이서 지구 최후의 인류로 남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너도 그래? 작게 되묻고는 눈 살풋 감는다.) 여름은 조금 그립겠지만. (별 가치 없는 잡생각은 치우고 마주 기대었다. 이렇게 한가해도 괜찮을까...)
윤:그래, 혼자가 아니니까. (적어도 너와 함께면 외롭지만은 않아서. 그것만으로도 함께 죽어갈 명분은 충분했다.) ...덥고 습하고 짜증나던 장마까지 전부 그리울 거야. (공기는 날카롭게 건조하며 차가우나 적막하고 평화롭다. 이러니 멸망이 피부로 와닿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인류가 멸종하기 전에도 지구에는 꾸준한 대멸종이 있었단다. 땅이 움직이고, 화산이 폭발하여 화산재가 모든 걸 뒤덮는 등의. 그에 비하면 참 조용한 멸종이지 싶다. 언젠가는 또 제자리로 돌아오겠지. 늘 그랬듯이. 끝의 두 문장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너와 내가 반드시 우주로 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지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여기는 같이 있기에 그닥 좋은 환경은 아니잖아. 이왕이면 행복한 게 낫지.
리젠타인:(누구나 어렴풋이 생각해 왔던 이곳의 종말도 이리 평화로울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평소라면 끝없이 되묻고 의심했을 것들도, 네 나지막한 두 문장에 더 이상 잔류하지 않고 눈과 함께 묻혀버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너가 믿는다면, 난 우리가 분명 우주로 갈 수 있을 거라 믿어. (눈 꿈벅...) 다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그리워하는 지구는 영영 없을 테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곳의 따뜻함이 꼭 필요하다면, 나는 네 온기로 만족해. (고개 들어 걸어 지나온 길 천천히 되돌아봤다. 저 끝에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끝까지 함께해 줄 거지?
윤:...나도. (다시 한 번 손 맞잡는다. 옅은 온기가 오갔다. 제가 느끼기에 꽤 괜찮은 감각이다. 다른 것의 온기를 받는다는 건. 이건 온기를 느끼는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만족해. (행복한 미소. 눈 천천히 뜬다. 아까보다 어두워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 고쳐 앉는다.) ...당연한 말씀을.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는데.
리젠타인:(의자에서 슬 일어나고는 맞잡은 손 당겨 일으켜준다.) ...응, 금방 어두워졌네. (...) 이만 돌아가자.
밤이 찾아온 지구를 비추는 것이라곤 달뿐입니다.
역시, 돌아가는 길이 더 어려워지지 않도록 지금 전망대를 내려가는 게 낫겠습니다.
전망대 계단을 내려가는 건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입니다.
윤을 따라 전망대 계단을 내려가는 시간이 어쩐지 쌀쌀합니다.
밤이 찾아오면서 온도도 더 낮아졌기 때문이겠죠.
그 사실을 윤 역시 알고 있는지 내려가는 걸음이 분주합니다.
리젠타인: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2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추위에 너무 오래 머물렀던 탓인지 미열이 느껴집니다.
하긴. 다른 날에 비해 좋은 날씨였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버티기 힘든 온도입니다.
몽롱하고 까마득한 기분이 느껴지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이상하게 발이 시리지 않았습니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과는 다르게 따뜻한 온도가 리젠타인을 맞이합니다.
내부 온도는 고작 영상 9도에 그치지만 충분한 온도입니다.
윤은 데운 물을 가져와 리젠타인의 다리를 녹여 줍니다.
전망대에서 대피소로 걸어올 때, 리젠타인의 걸음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나 봅니다.
하지만 달리거나 계단을 오르는 일 등은 조금 어려울 것 같네요.
리젠타인의 다리를 녹여 준 윤은 리젠타인을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줍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지금 보는 풍경보다 눈이 조금 더 쌓인 풍경을 보게 될 겁니다.
내가 깨워 줄게.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젠타인의 의식이 꺼집니다.
리젠타인:
듣기
기준치: |
70/35/14 |
굴림: |
83 |
판정결과: |
실패 |
(...)
잠결에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분명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눈을 뜨자 불길한 붉은 빛이 문 밖에서 깜박이고 있습니다.
대피소 내부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문을 닫아 놓았지만 복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전부 막을 수는 없습니다.
리젠타인:
SAN Roll
기준치: |
70/35/14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윤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피소 밖을 나갈 때 입는 외투와 신발이 없어진 걸 보면, 또 전망대로 간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건 윤은 동면실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걸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냥 기다리자니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고, 윤을 찾아 나서려고 해도 어젯밤 걸렸던 동상이 아직 완벽하게 낫지 않았습니다.
밤새 눈이 더 내렸으니 눈길을 헤치고 윤에게 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바깥에 나가지 말라는 윤의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동면실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동면실을 관리하는 사람은 윤이니 관리 책임을 윤이 감당해야 할 수도 있죠.
테이블과 함께 둔 의자에는 어제 입었던 윤의 옷이 걸려있습니다.
옷 주머니를 뒤지자 동면실 출입이 가능한 윤의 관리자인식증이 나옵니다.
현관문을 열자 방에서 느꼈던 경고등보다 훨씬 더 밝고 강한 빛이 깜박입니다.
대피소 전체에 경고를 하고 있는 것 처럼 요란스럽습니다.
경고하는 AI의 음성 속에서 동면된 사람들이…
새 터전을 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서늘하고 어둡기만 했던 복도가 네온등이 켜진 것처럼 환합니다.
그닥 좋은 의미로 밝아진 건 아닌 것 같지만, 가는 길이 무섭지는 않으니 잘된 일일까요?
어제 윤과 다녀온 이후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윤의 관리자 인식증을 윤이 했던 것처럼 문에 갖다 대자 익숙한 음성이 들립니다.
― 17%… 46%… 79%… 관리자 확인 증명되었습니다.
동면실 내부는 경고등이 켜진 것 외에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동면 캡슐들 중 하나의 캡슐이 붉게 깜빡거립니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사람은 제니였던 모양입니다.
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를 다시 찾아 읽어 봐야겠습니다.
리젠타인:(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 찾아봅니다.)
― 인간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
동면 기기 (냉동수면)의 작동 유효 기간은 수 세기. 정상적인 최적 작동 가능 기간은 250 - 400년 사이입니다. 동면 기기는 관리자의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고 동면 기기의 유효 기간이 끝나면 기기는 재 사용할 수 없습니다. 관리자는 다음의 설명을 따라 동면 기기를 관리해주시기 바랍니다.
■<기기 장치 정보>
① ON
동면 기기 좌측 최상단. 초록 불빛은 정상 작동. 붉은 불빛은 이상 작동을 나타냅니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을 시 동면 기기 작동이 종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동면 기기 좌측 상단. 동면 기기 작동 종료 버튼입니다. 관리자의 허가 아래 AI 신체 보호 기능도 함께 OFF 하여야 완벽한 종료가 가능합니다. 신체 보호 기능을 OFF하지 않을 시 동면 기기는 동면체의 안전을 위해 종료되지 않습니다.
③ INF
동면 기기 우측하단. 동면체의 고유 정보와 현재 심박수. 맥박. 호흡. 의식 등을 동면 캡슐 외부로 표시 가능합니다. 동면 캡슐 내 동면체의 정상적인 심박수와 맥박. 호흡은 0을 유지해야 합니다. 동명 기기의 유효 기간이 가까워지거나 종료되었을 시 동면체의 의식은 최대 10까지 향상 될 수 있습니다.
1-3 : 동면체가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단계
4-6 : 동면체가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동면체의 의지로 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단계
➤:7-10 : 동면체가 잠에서 깨어난 상태 변화 단계
④ 동면체 비활성 의식 유지
사용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동면 기기는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가 최악의 상황을 피해 죽음으로부터 삶을 연명시킵니다. 기기는 동면체의 생존 가능한 삶을 원합니다. 단, 관리자의 판단으로 동면체의 동면이 종료된 후에도 정상적인 환경에서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동면체 비활성 의식 유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동면체 비활성 의식 유지를 택할 시 동면체는 동면에서 풀려나지 않고 동면 상태 그대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동면 기기는 동면체의 동면을 풀지 않고 작동이 종료됩니다.
제니의 정보를 보면, 제니의 의식이 6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라면 머지 않아 곧 동면에서 풀려날 것 같습니다.
지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고 오히려 상황은 더 안 좋아지고 있는데.
제니의 동면 캡슐을 살피면, ON 버튼에 붉은 빛이 들어와 있고, 경고등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제니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걸 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까요?
리젠타인: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6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가 놓여 있던 자료 보관함에 상자 하나가 깊숙히 놓여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상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어딘가 오래 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리젠타인의 손바닥 만한 크기의 작은 상자입니다.
상자 안에는 여러 명의 인식증 카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카드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에는 제니도 있습니다.
동면 캡슐에 들어가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죠.
그렇다는 건 이 인식증 카드는 동면 캡슐에서 동면하고 있는 저 사람들의 것이군요.
인식증에는 이름과 국적만 다를 뿐 동일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윤의 직급은 대피소 관리인이지만, 그들의 직급은 대피소 생존 인류.
동면 캡슐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윤처럼 관리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 인식증을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
리젠타인:
지능
기준치: |
70/35/14 |
굴림: |
3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그들의 인식증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기억을 더듬습니다.
대피소에 들어온 직후 누군가가 리젠타인에게 주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잊고 있었을 만큼 오래 전에 잃어버렸나?
어쨌든, 그렇다면 이 사람들의 인식증으로도 동면실의 철문이 열릴 일은 없겠네요.
계속되는 경고음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이 정도로 지속되는 경고라면 동면실 내에 있는 AI 기계들이 손을 쓸만한데도 그렇습니다.
동면 캡슐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인식증을 들고 동면실에 존재하는 문을 향해 걸어갑니다.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는 경고등이 거슬리지만 리젠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후 윤을 계속 기다리거나, 윤을 찾으러 전망대에 가거나 할 뿐이겠죠.
리젠타인이 인식증 중 하나를 꺼내 문에 가까이 갖다 대자 예상과는 다른 AI 음성음이 들립니다.
대피소 내부 통제실을 개방합니다. 내부 통제실 진입시 AI의 출입이 제한됩니다. 10. 9. 8. 7….
동면실에 위치한 대피소 내부 통제실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윤이 개방 준비를 하고 있던 AI의 작동을 정지시켰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들리는 윤의 가쁜 숨소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은 눈을 털어내지도 않고 달려왔는지 윤의 모습은 엉망진창입니다.
불안함과 조급함이 느껴지는 경고등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립니다.
붉은 센서에 물들었다가, 꺼졌다가, 다시 물들었다가.
꺼졌다가 반복되는 빛이 윤의 얼굴을 연속적으로 비춥니다.
윤의 표정은 큰 미동 없이 잠잠하기만 합니다.
윤이 동상이 걸린 리젠타인의 다리를 걱정하기는 했지만, 이런 순간에 나올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로 윤은 리젠타인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리젠타인에게 다가와 리젠타인이 들고 있는 그들의 인식증 카드를 가져가는 행동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요.
리젠타인:...응. 그보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윤:이 상황? 뭐... 뻔하지. 가끔 기계에 이런 오류가 생길 때가 있었어.
그건 됐고... 여기는 오래 전에 폐쇄된 곳이야.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가지 마.
리젠타인:괜히 호들갑 떤 것 같네. (머쓱...) 들어가면 왜 위험한데?
윤:...아무튼 위험해. 자세히 설명하기엔 복잡한데... (철문 본다.) 동면실에 작은 문제가 생겼나 보네. 뭐가…….
윤은 리젠타인에게서 인식증을 가져오고 나서 동면 캡슐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동면 캡슐을 오래 관리했던 윤이라면 무슨 문제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INF 버튼을 누르자 제니의 고유 정보와 의식 단계가 캡슐 위로 생성됩니다.
윤이 캡슐과 프로젝트 화면을 오가기를 몇 번.
복도에서 깜빡거리고 있던 센서도 사그라든 것을 보니 대피소 내부 전체를 밝히던 경고 센서가 제어된 것 같습니다.
기계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윤은 리젠타인과 동면 캡슐을 번갈아 봅니다.
…동면 캡슐. 멈출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윤은 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에 적혀있던 4번째 사항, 동면체 비활성 의식 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윤:아니, 잘못 말했어.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제 뒷목 만지작...)
리젠타인:(윤 가만히 쳐다본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다면, 동면체 비활성 의식 유지를 하자는 거야? (이유는...?)
윤:그렇지. …지구는 아직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이 사람들이 잠에서 깰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어차피 비활성하려고 했어. 동면에서 깨어나 봤자 오래 살지 못할 테니….
리젠타인:(...) 하지만 동면에서 이렇게 일찍 깨어날 리가 없는데...
이곳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윤:그건 모르겠네. 하지만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한 이상, 돌이킬 수는 없으니까...
리젠타인:너가 판단하기에 그게 옳다면, 그렇게 해. (침묵...) 예상한 대로 결말이 안 좋아서 조금 찝찝하네.
윤:뭐, 동면이란 게 죽음을 감수하고 하는 거니까…. (동면 캡슐 슬쩍 본다.)
리젠타인:
심리학
기준치: |
50/25/10 |
굴림: |
56 |
판정결과: |
실패 |
아무래도 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윤:우선 나가자. 혼자 둬서 미안해. 잠시 전망대에 다녀와서...
왜 그렇게 매일, 추운 온도를 감내하고 전망대로 가는 걸까요.
우주선 발사지와 도착지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으로 돌아온 윤은 리젠타인에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했던 게 미안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동면 캡슐에 대한 처분을 생각하느라 그랬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금방 정상으로 돌아와 리젠타인에게 가벼운 먹거리를 건네 줍니다.
좋은 소식? 그렇게 말하는 윤의 표정은 이전과 다르게 조금 들떠보입니다.
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선 전파기를 꺼냅니다.
윤:확실하지는 않은데… 지구 근처 우주 상공에 누군가 와 있는 것 같아.
전망대에 갔을 때 신호가 잡혔거든. 너무 짧은 통신이라 대화는 하지 못했지만.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우리는 곧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거야.
”그럼 아까 내가 말했던 동면 캡슐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자. 우리를 데리러 온 거라면 동면한 사람들도 같이 갈 수 있겠지.”
정말 지구를 떠났던 인류가 우리를 데리러 오기 위해 지구에 돌아온 거라면. 혹은 그들이 아니어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봐 준 누군가가 있다면 이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이 추위와 고립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윤의 저런 미소를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멸망된 지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리젠타인:금방 또 좋은 소식이 생겼으면 좋겠네...
윤과 리젠타인의 사이도 이전과 달라진 게 없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루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윤이 들었다던 전파는 그 후 더 이상 소식이 없었고…
지구의 온도가 이전과 다르게 더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할 것 없이 눈이 몰아쳤습니다.
이미 멸망한 지구지만 그 사실을 더 확고히 하는 것처럼.
다시는 생명을 품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지구의 얼음은 자꾸만 두꺼워집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파를 잡겠다고 전망대로 간 덕분에 윤이 감기 몸살로 열이 올라 앓아 눕게 된 날이.
몇 번 기침을 하던 윤은 오늘 아침까지도 전망대에 가려고 했지만, 역시 무리였습니다.
저런 몸을 하고 이 추위에 대피소 밖을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죠.
결국 침대에 누워 무선 전파기를 몇 번 만지다가 잠에 들었습니다.
리젠타인:
듣기
기준치: |
70/35/14 |
굴림: |
3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고개를 돌리자 윤이 잠들기 전 가지고 있었던 무선 전파기에서 낯선 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무선 전파기에서 전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높게 오른 열에 시달리던 윤은 전파음을 듣지 못하고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이 전파를 누가 보냈는지. 어디서 왜 보냈는지 아는 게 없습니다.
무선 전파기 너머에서 모스 부호로 해독된 문자가 재생되어 들렸습니다.
윤의 말대로 지구를 떠난 인류가 새로운 행성을 찾은건가?
전파기에서는 계속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잡음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전부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생명 활동 감지 대상이 없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리젠타인:
지능
기준치: |
70/35/14 |
굴림: |
4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들이 이 지구에 남아있는 생명체를 확인하기 위해 전파를 흘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우주를 향해 전파를 쏘아올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이곳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요.
저들이 이 지구를 다시 떠나기 전에. 전파를 쏘아올릴 수 있는 곳은 이 대피소 안…
지금 리젠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전파 탐지실로 가서 대피소에 부착되어 있는 전파 기기를 작동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의 관리자 인식증을 챙겨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젠타인의 인식증은 없으니까 말이죠.
리젠타인:(약간 좀도둑이 된 기분인데...)(윤 인식증 챙겨서 출발합니다...)
― 21%… 57%… 92%… 관리자 확인 증명되었습니다.
윤의 관리자 인식증으로 전파 탐지실 문을 열었습니다.
전파 탐지실은 2인이 앉을 자리만 있을 정도로 좁고, 기계들이 벽을 가득 잠식하고 있습니다.
리젠타인:
교육
기준치: |
50/25/10 |
굴림: |
90 |
판정결과: |
실패 |
(음...)
누군가에게 작동법을 배운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무전기에서는 여전히 생명 활동 감지 대상이 없다는 소리만 새어 나옵니다.
리젠타인:
SAN Roll
기준치: |
68/34/13 |
굴림: |
2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기의 전원을 누르자 곧 불이 들어오더니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전선에서는 스파크가 튀며, 이미 끊어져 버린 전선들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전파 기기에 부착되어 있는 모든 전원 화면이 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조롭게 작동되어 가는 것 같으니까요.
곧 화면에 지구 주위 우주 상공 상태창이 나타납니다.
얼어붙은 지구 주변으로 작은 물체가 잡힙니다.
전파는 그곳에서 모스부호가 되어 번역되고 있습니다.
우주선이 떠나기 전 이 지구에 아직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곧, 리젠타인은 아주 무거운 전류를 느낍니다.
리젠타인: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85 |
판정결과: |
실패 |
전류를 느끼자마자 전신이 아찔하고 따가운 감각에 휩싸입니다.
손과 발 끝이 저릿저릿하고 시야가 막연하게 어두워집니다.
기기 화면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지만, 적어도 지구 근처에 존재하는 우주선이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드디어 화면에 그들의 규칙적인 전파 음성이 나타납니다.
행성에서 보낸 전파를 탐지했다. 생명체가 있으면 대답해.
리젠타인이 쏘아올린 전파가 그들에게 닿았나 봅니다.
그들이 답을 보냈으니 우리도 답을 보내야 합니다.
...우선은 이 지구에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
리젠타인:(아하. 살아있다는 답 보냅니다...)
리젠타인이 화면에 대답을 생성하자 기기는 그 대답을 일정한 주파수로 바꾸어 우주로 쏘아올립니다.
화면에는 그들이 보낸 답이 송출되고 있습니다.
다시 확인해 봐. 지난 한 달 간 우리들은 지구 주변을 수백번도 더 돌았지만 생명체는 전혀 감지 되지 않았어.
지금 이곳에 윤과 리젠타인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방황하고 있는 리젠타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다시 답을 송신했습니다.
리젠타인:
SAN Roll
기준치: |
68/34/13 |
굴림: |
4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리젠타인:...다짜고짜 인간이 아니라니. 설명이 필요한데. (답 툭툭 보냅니다.)
➤:"우리들의 기계가 고장난 게 아니라면, 너에게선 인간의 생체 활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아. "
"안타깝게도 우리 쪽 기기 오류는 아닌 것 같네."
"우리는 네가 전파를 쏘아 올린 그곳 바로 위에 있어."
"네가 있는 곳은 아주 오래된 대피소 같은데, 너는 그곳을 관리하는 관리자인가?"
리젠타인:그... 관리자는 내가 아니다. (...)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너희 쪽 기기의 오류가 아니라고?
(머리 지끈...)
➤:"대피소 전체를 스캔해 봤는데 지하에 동면 캡슐이 6개 있다고 나타나는군."
"하지만 그 외에는 없어."
"너를 포함해서 그 윤이라는 존재도 생체 활동이 감지 되지 않아. 내 생각에는 너와 그 존재는 인간이 아니야."
"너무 긴 시간동안 작동되어서 그런지 정보 저장에 오류가 생긴 것 같네."
"하긴. 400년이면 그럴 만도 하지."
➤:"몰랐어? 우리는 지구를 버렸던 인류의 후손이야."
"정확히는 새로운 행성 ‘알파 566’을 고향으로 가진 인류지."
"알파 566도 이제 살기 어려운 땅이 되어 버려서 이전 고향을 탐사하러 온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곳은…… 선조들이 말했던 대로 여전히 최악이군."
리젠타인:(...) 내가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그럼 우리는 영영 이곳에 버려졌던 건가. 하지만 어떻게 말도 하고 숨도 쉴 수 있는 거지? (여전히 의심...)
➤:"그거야 모르지. 우리한테 물어봤자 소용 없어."
리젠타인:전혀... 달갑지 않은 소식이네. 전파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한숨) 여기의 시간만 멈추어 있는 것도 아니고... (윤은 아직 잠들어 있나?)
➤:"글쎄다. 시공간 왜곡의 문제인가? 아무튼, 우린 ‘알파 566’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지구를 방문하지는 않을거야."
"여긴 말 그대로 우리가 버린 행성이니까."
"이 행성은 버려졌어."
지구를 버리고 우주선을 탄 인류는 새로운 지구를 찾았고, 그곳을 ‘알파 566’ 이라고 명명했으며,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생각하지도 않았을, 떠나버린 인류를….
➤:"며칠 전에 신호를 처음으로 수신한 존재가 있었지. 그 존재가 네가 말하는 윤인가 봐."
"그도 우리에게 자신들을 데려가려고 찾아온 게 아니냐고 물었는데 말이야. 그래서 이야기해줬어. "
"너희가 인간이 아니든, 정말 400년 동안 살아남은 인류든…."
"알파 566으로 데려 가려고 온 건 아니라고 말이지."
"자리는 한 자리밖에 없고, 이후에는 다시는 이곳을 방문하지 않을거라고."
"그랬더니, 데려가야 할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기다리던 도중 이 행성의 기후가 너무 혹독해서 244시간 동안 통신이 먹통이었어."
내부 통제실에 진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무선 전파기로 전파를 보낸 인류의 후손이 내부 통제실을 막고 있던 AI 활동을 제한시켰기 때문입니다.
동면 중인 제니를 지나쳐, 리젠타인은 내부 통제실 문 앞에 섭니다.
AI가 리젠타인을 인식하더니 곧 익숙한 음성이 들립니다.
대피소 내부 통제실을 개… 개…니다. 내부 통제실 진입 시 AI의 출입이 제한 되…. 되… 됩니다.
얼어붙은 먼지들이 오랜만에 불어오는 외부 불빛을 환영합니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온도가 리젠타인을 감쌉니다.
마치 대피소 밖을 나온 것처럼 온몸에 한기가 듭니다.
금방이라도 또, 동상에 걸릴 것 같은 기분입니다.
리젠타인: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전류를 느끼자마자 몸 전신이 아찔하고 따가운 감각에 휩싸입니다.
손과 발끝이 저릿저릿하고 눈 앞 시야가 막연하게 어두워집니다.
내부 통제실은 여태까지 봤던 대피소의 그 어떤 곳보다 크기가 거대합니다.
대부분의 기계들이 추위에 얼어붙었고, 뚝뚝 끊어진 전선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습니다.
리젠타인이 내부 통제실에 들어서자 깜박깜박 불길한 경고등이 통제실 내에 가득 켜집니다.
AI의 출입이 제한됩니다. AI의 출입이 제한됩니다. AI의 출입이 제한…
[ 통제실 화면 | 음성 녹음기 | 통제실 연구 보관함 ]
통제실에 있는 수많은 화면 중 단 하나의 프로그램 화면만이 빛을 내고 있습니다.
동면 캡슐에 잠들어 있는 사람과 윤, 그리고 리젠타인의 고유 정보가 화면에 인식되고 있습니다.
제니 | 미국 | 인간 | 동면 중 | 현재 의식 단계 6단계 | 대피소 생존 인류
리젠타인 | 한국 | AI 인공 로봇 |대피소 생존 인류 후 개조
우리에게는 인간이 살아 있을 때 발생되는 생체 신호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 지구에서 살아남은 생명체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죠.
400년 동안 지구에서 동면되지 않은 채 살아가기 위해서.
리젠타인:
SAN Roll
기준치: |
67/33/13 |
굴림: |
4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화면은 빠르게 변해서 지난 400년간 대피소 내부에서 녹음된 음성 화면을 띄웁니다.
동면에서 깨어날 인류를 위해 저장된 음성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윤의 것입니다.
녹음된 시기는 리젠타인이 기억하고 있는 지구 멸망의 날.
2XXX. XX. XX. 음성 녹음
"정말 동면하지 않을 거야?"
윤:안 해. 어차피 동면실을 관리할 관리자가 필요하던 참이었잖아.
➤:"그건 로봇들에게 맡기면 돼. 그들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르게 수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작동할 수 있어."
"...물론 대피소 전체의 관리를 로봇에게 맡기는 건 굉장한 도박이긴 하지."
"그래도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나아. 인류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안 돌아올지도 모르고."
윤:...머지 않아 돌아올 거야. 리젠타인이 나와 함께 있을 거니까 괜찮아.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리젠타인도 너도 사람이야.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
➤:"너,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지?"
➤:"네 선택에 리젠타인의 의견은 있는거야?"
윤:만약 동면에서 깨어나도 소용 없으면 어떻게 할까.
This message has been hidden.
윤:너와 그 사람들이 동면 유효기간까지 동면을 유지했지만 지구는 여전히 가망이 없고, 인류가 우리를 데려오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에 관한 답이 필요한 거야?"
윤:혹은 그들이 지구에 다시 돌아와도 우리를 데려갈 생각이 없다면...
윤:미안. 나는 너흴 최선을 다해 관리하겠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 모두를 데려갈 거라는 것도 현실성 없는 가정이잖아.
"그래. 그렇게 된다면 그냥 우리를 비활성해 줘."
"…우린 또다시 절망하고 싶지 않아."
"대피소를 잘 부탁해. 아니, 우리를 잘 부탁한다고 해야 하나."
➤:"동면에서 눈을 뜨면, …너와 리젠타인이 없었으면 좋겠어. 무슨 선택을 한 건지 바로 알게 될 테니까."
"윤진우."
"제발 무모한 짓 하지 마."
걱정 마. 리젠하고 나는 안 죽을 테니까.
지금은 리젠타인의 기억으로부터 400년 후입니다.
리젠타인의 기억이 400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도, 리젠타인이 아직 자신을 인간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동면을 선택하는 대신, 지구로 돌아올 우주선을 하루 하루 기다리기 위해.
누구보다 지구를 떠난 인류가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그 확률이 아주 희박하다는 것쯤은요.
인류가 돌아와도 대피소에 있는 모두를 데려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윤이 그렇게 물었던 이유는 그들이 동면에서 깨어나면 절망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제 곧 대피소는 완전히 눈에 파묻힐 테고, 전망대의 꼭대기는 상공에서 보이지 않게 되겠죠.
절망하고 싶지 않으니 비활성 의식 유지를 해달라고 하던 사람들.
윤은 리젠타인을 떠나 보내기로 결정한 겁니다.
기온이 낮은 내부 통제실의 장점은 연구 자료들의 훼손이 덜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작성한 건지 모를 자료들은 대부분 인간과 로봇의 개조 특성에 대해 기재되어 있습니다.
리젠타인:
교육
기준치: |
50/25/10 |
굴림: |
71 |
판정결과: |
실패 |
교육
기준치: |
50/25/10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빽빽하게 저장되어 있는 보관함에서 <인간과 기계의 신체 결합 개조>에 대한 자료를 발견합니다.
자료에는 인간의 피부조직과 장기. 어떻게 정복 인식을 처리하고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이 적혀 있습니다.
적합한 개조를 위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키와, 몸무게, 성별 정보가 필요했는지 수식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그 정보에 정확히 부합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이제 리젠타인도 알고 있습니다.
리젠타인뿐만 아니라 윤 역시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 되었으니까요.
둘은 로봇이 되었지만 외관은 인간과 동일합니다.
로봇이 된 인간은 인간처럼 고통과 미각, 후각, 청각을 똑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식’ 하도록 우리들의 내부에서 프로그래밍 된 결과일 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부품이 낡고, 고장이 났고 오류가 생기는 것을 꾸준히 관리 교체 해주면 로봇은 더 오랜 기간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윤과 리젠타인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대피소에서 구할 수 있는 부품이 모두 떨어지면 윤과 리젠타인도 작동이 멈추겠죠.
멈춰 있었던 음성 녹음 화면이 다시 작동됩니다.
음성 녹음 화면에 입력되는 날짜와 연도는 가장 최근입니다.
동면 캡슐에 이상이 생겨 리젠타인이 다녀갔던 그날부터 바로 며칠 전.
2XXX. XX. XX. 음성 녹음
내가 무모한 짓을 한 건 맞아. 터무니 없이 편향적이라 미안하긴 한데...
그렇지, 이 자리에 너희가 있었다면 나한테 관리자를 맡긴 걸 후회했을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한테는 더 이상 이 지구에서 리젠타인만큼…….
중요한 게 없거든.
지금 전망대 위에 네가 말했던 윤이 있는 것 같아.
하긴, 눈이 내리는 건 이 지구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 눈보라를 보고 있으면 이제 모든 게 끝인 것 같아요.
지구에 기대되는 미래 따위는 없고 최후에 남은 인류도 없습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지구가 버려졌다는 것과 우리 역시 버려진 존재라는 겁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세차게 내리는 눈 때문에 새겨진 발자국은 금방 새로운 눈 아래로 덮여 사라지지만, 리젠타인은 알 수 있습니다.
윤이 신발도 신지 않고 전망대로 걸어갔다는 것쯤은… 짧은 순간이라도 알 수 있어요.
제대로 옷을 입고 나오지 않아 두 팔과 다리, 뺨이 얼어 붙을 것 같이 차갑지만 이 통증 역시 인간이 느끼는 실제 감각이 아니겠죠.
모든 게 얼어붙을 것 같은 이 감정도, 지금 리젠타인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요.
계단 끝에 도착하자 꼭대기로 나가는 문은 열려 있습니다.
윤 뒤로 겹겹이 파묻혀 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윤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는 사과였습니다.
리젠타인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엇을 봤는지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윤의 붉어진 발과 멍이 든 것처럼 푸르고 우울한 색으로 변해버린 다리가 보입니다.
심한 동상에 걸려 피부가 자신의 색깔을 잃어 버린 것이지만,
그건 리젠타인에게도, 윤에게도 상관 없는 일입니다.
윤:자, 가져가. 잃어버린 건 아니야. 내가 가지고 있었어. 네 인식증은 대피소 내에서 이미 인간으로서의 통제권을 잃어버려서... 네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래도 네가 이 지구에서 살았던 인간이라는 건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거야.
윤은 리젠타인에게 낯설지만 익숙하게 생긴 인식증 카드를 건넵니다.
리젠타인의 얼굴이 새겨진 이 카드는 잃어버렸던 리젠타인의 인식증입니다.
400년 전의 물건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리젠타인:...이젠 딱히 필요 없는 물건일 텐데. (물끄럼...) 난 그때 그 살아있는 리젠타인이 아니잖아.
윤: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는 여전히 너인데. ...저 사람들 따라가려면 갖고 있어야지. 가서 신분 증명도 해야 할 거고.
리젠타인:...정말 그렇게 생각해? (붉어진 발 빤히 쳐다봤다.) 난 아닌데. (...) 너도 같이 가는 거야?
윤:네가 리젠타인이 아니면 뭔데. (간극.) ...아니. 자리가 하나 뿐이래.
리젠타인:그건, 기억만 갖고 있는 로봇일 뿐이잖아. (...) 그럼 난 안 가. 됐지? (미소...)
윤:... (눈 데굴...) 화나진 않았어? 내가 널... 속이고...... ...한 것에 대해서.
리젠타인:다 벌여 놓고 이제 와서 잘도 물어보는군. (얼굴 빤...)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어도 이때까지 별 말 않은 건, 어떤 것이든 내가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린 같은 마음일 테니까.
윤:.…네가 나한테 실망했어도, 나한테 화가 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괜찮지 않았던 것 같네. 그런데…. 그런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내가 느끼는 게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 단편적인 것만 남았어. 네겐 3년이었겠지만 나에겐 400년이었으니까. (음성이 잘게 떨린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린 같은 마음일 거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말인지 몰랐고…, 나는… 나는 너와 뭘 하고 싶은 걸까. 나는… 네가 뭘 어떻게 해주길 바라고 있는 걸까. (네 오른손 제 두 손으로 감싸 잡는다. 얼어붙은 탓에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널 따뜻한 곳으로 보내서 계속 살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너와 헤어지는 것은 싫어. (제가 잡은 손 보며 손이나 작게 꼼질댄다.) 혹시나 우리가 함께 그 행성으로 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스스로 질문해 보았지만…
네 기억을 계속 돌리고, 우리가 지구에서 기다렸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난 내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할 수가 없어졌어. 이대로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끝나 버릴 때까지 고립될 것만 같았으니까. 아니, 차라리 그렇게 포기해 버렸으면 나았을 텐데. 널 보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겨서…. …내가 널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가 동면했더라면.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천천히 죽을 수 있었을 텐데. 너에 대한 좋았던 기억만 갖고 말이지. 괜히 개조도 하지 않고, 그 긴 세월 버티지도 않고. …이래도 같은 마음이야? 너는, 네 모든 선택을 후회하고 있나?
리젠타인:나보다 네가 더 생각이 많으면 어떡해. (자유로운 왼손으로 가볍게 네 볼 감쌌다.)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것조차 거짓말이었어? 그게 아니라면...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쨌든, 이건 네가 준 삶인걸. 그러니까... (눈 가볍게 감고서 할 말 골랐다.)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으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리 말하고서 방긋 웃었다. 항상 원칙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헤어지는 게 싫다고 했지? 그럼 헤어지지 않으면 돼. 내가 따뜻한 곳에서 계속 살기를 바란다면, 내게 제일 따뜻한 곳에 남게 해주면 돼. (새삼 제 손에 전해져 오는 온기를 느낀다. 적당히 기분 좋은 온도. 우리는 딱 이 정도만큼만 살아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난 우릴 버리고 떠났을지도 모르는 그들을 기다릴 만큼 인내심이 많지 않아. 3년이든, 400년이든 별로 달갑지 않은 기다림을 납득한 것도 다 너를 위해서였어. 기다린 건 순전히 내 의지였다는 말이야. (알겠나?) 이미 죽은 리젠타인도... 지금의 나도. 난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이 거짓말쟁이야.
멸망한 지구에서 우리는 수 세기를 살았습니다.
리젠타인의 앞에 있는 윤도, 윤 앞에 있는 리젠타인도….
그렇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개조된 인공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형태는 갖추고 있지만 이미 인간으로서의 정의는 잃었습니다.
윤은 인간이었던 리젠타인을 로봇으로 만들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변했습니다.
우리들을 지구 최후의 인류라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요?
인류라고 하기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우리를.
윤이 그토록 오래 스스로에게, 또 리젠타인에게 물었던 질문.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점점 날도 어두워지고 눈은 순식간에 더 높게 쌓여갑니다.
이 추위에 나와 있는 우리들은 이번에도 역시 동상에 걸리거나 감기를 앓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전혀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윤: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자. 같은 마음이야. 우린 함께 있어야 해. …….
……내 생각에도 여기가 나에게 있어 제일 따뜻한 곳인 것 같네.
더 거세진 눈발에 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윤이 조용히 미소 지은 채 눈물 흘리고 있다는 것쯤은요.
윤의 그 미소에는 인간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을까.
인간이 아닌 리젠타인은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대로 우주로 간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리젠타인이 인간이었을 시절 살았던 지구는 이곳에 있고 윤 역시 이곳에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로 남았든, 여전히 춥습니다.
우리는 딱 이 정도만큼만 살아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400년 동안 윤에게 중요한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고장 날 것처럼 울고 있는 윤의 얼굴은,
인간이 아닌 리젠타인이 보기에도 조금은 인간 같아 보입니다.
400년을 기다렸던 인류의 전파가 멀어져 갑니다.
작은 기계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을 겁니다.
난 우리가 동면을 선택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이라고 믿어.
그 말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윤과 리젠타인마저 없다면 정말 외롭고 추울 것 같으니까.
우리는 진작 멸종되었어야 할 지구 위 생존 인류입니다.
나는 우주를 사랑하는 만큼너라는 별을 사랑해.우리는 멸종의 시대에 남은 최후의 존재야.
─────── ENDING 2 ───────멸종된 시대에 남은 최후의 존재